행복에 관한 소고
이번 챕터부터는 어떻게 하면 행복을 추구할 수 있을 지에 대한 러셀의 논의이다. 러셀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측면에서 행복의 특성이 나뉜다고 말한다.
모든 인간에게 허용된 행복,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자의 행복
러셀이 첫번째로 말하는 행복은 모든 인간에게 허용된 행복이다. 그것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잘 수행하는 것으로 느끼는, 원초적인 행복을 말한다.
그가 예시로 든 우물 파는 사나이는 그저 신체 건강하고 그날 주어진 우물파기 과업을 잘 수행하는 것에 행복감을 느낀다. 정원사들은 그저 정원을 망치는 토끼를 잘 잡아내고 정원을 깨끗하게 하는 데서 행복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러나 러셀은 이들이 느끼는 행복이 소위 '저차원적'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언뜻 보기에는 병원균을 탐구하는 것이 더 가치로워 보일지 몰라도, 결국 병원균을 연구해 행복을 얻는 거나 토끼를 고찰해 행복을 얻는 거나 결국 탐구와 성취를 통해 행복을 이뤄내는 대원칙은 같다는 것이다.
러셀은 이어서 속한 공동체의 특성에 따라서도 행복의 조건이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서구 국가에서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이들이 그 재능을 실현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지 못해 불행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동구권 또는 동양사회에서는 젊은이들이 사회를 발전시켜야 할 분야가 상당하기에 무료함을 느끼지 않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으나, 서구에서는 사회에 해가 되는 삶을 살거나 무료한 삶을 살거나 하는 양면적인 처지에 놓이게 된다고 한다.
이는 2023년 대한민국의 시점과 상당히 부합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제 연 경제성장률이 바닥을 찍고 더 이상 사회 전반적으로 '발전의 역동성'을 찾기 어려운 우리나라에서는 청년층의 행복지수가 바닥을 기며, 과거 산업화시절 처럼 내가 노력하면 발전하고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이 사회 전반적인 N포세대, 욜로현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손주은 메가스터디그룹 회장은 과거 더 이상 한국사회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찾기 어렵고, 찾아도 생산성이 낮고 소위 타산이 나오지 않으므로, 동남아 또는 아프리카로 가서 사업을 하라고 말한 바 있다.
러셀은 이어서 자신이 속한 직업 또는 특성과 사회적 가치로 인해 행복이 달라질 수 있음을 말한다.
과학자들은 예술가보다 더 행복하다
과학자는 고도의 지능을 과학연구에 쏟아붓고, 자신이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영역엔 발을 들일 엄두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한다. 잘하는 분야에서 '자기효능감'이 극대화되고, 그렇지 않은 분야에 대해서는 자괴감이 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대다수의 일반적인 직장인 대한민국 남성과는 반대되는..)
또한 모든 사람들이 과학의 중요성을 알아서 존중해주기 때문에 그들은 행복하다고 말한다. 일반인들은 설령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해도 대단한 일을 하고 있겠거니하고 인정해준다는 것이다. 반면 예술가들은 일반인들이 이해 못하면 나쁜 그림, 나쁜 작품을 만들어낸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다. 회의적 태도에 맞서 자기주장을 되새겨야 하는 상황에서 보통의 인간이 행복하기는 쉽지 않다.
위와 같은 러셀의 행복에 대한 분석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타고난 유전자와 태어난 시기, 태어난 국가가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가?
그리고 위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매우 높게 '그렇다' 이다. 앞선 글에도 언급했듯 나의 행복은 나의 타고난 특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안타깝게도 나의 성향은 돈벌이와 관련된 재능과 큰 관련이 없다. 숫자를 좋아하지도 않고 심도있는 분석에도 큰 관심은 없다.
안타깝게도 내가 태어난 대한민국은 이미 발전이 사실상 완료된 사회여서 내가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역량을 찾기도 어렵다.
안타깝게도 내가 태어난 이 시기는 이미 많은 기술의 발전이 진전되어 통역 등의 가치가 덜 중요하므로, 내가 그나마 소질있는 언어적 역량은 크게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너무 운명론적이고 비참해질 것이다. 나의 유전적 특성과 태어난 시기, 국가는 나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러셀은 이 논리를 의식하기라도 하듯, 과거의 농부들보다 현대의 기계숙련공이 훨씬 행복할 것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그들의 삶에 대해 통제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통제권은 반드시 타인이나 사회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된다. 단순한 취미에의 몰두, 사소한 신념에의 몰두 모두 타인에게 해를 주는 즐거움만 아니면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원천이다.
러셀은 근본적 행복은 인간과 사물에 대한 따뜻한 관심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을 관찰하기 좋아하고 개인의 특성 속에 기쁨을 느끼며 지배하거나가 아니라 관심과 기쁨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트리엔트 공의회나 별들의 생애에 대한 순수한 관심을 통해 자신의 근심을 잊을 수 있는 사람은, 비인격적 세계로 나들이하고 돌아온 순간, 침착성과 평온함을 느끼면서 자신의 근심거리를 가장 잘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때 그는 비록 일시적이지만 진정한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결국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이 대단한 가치를 가졌든, 나만 그 가치를 알아주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기왕이면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이 사회적 가치를 가지고, 돈을 많이 벌어다주며, 내가 속한 사회와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위 조건을 충족할 수 있을 것인가?
현실적으로 요건충족이 안 된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내려놓는 것도 방법이다. 현실은 인정하고 직시하여 내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 가능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2023년 대한민국에서 평범한 하루를 사는 직장인 아빠로서 내가 할 수 있는 평범한 행복추구의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