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로버트 A. 하인라인, 『심연』
하인라인의 진지함과 유쾌함 모두를 엿볼 수 있을 만큼 스펙트럼이 넓은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 중단편 모음집 중 책 전체를 포괄하는 인상으로 따진다면 가장 인상 깊었다.
하인라인은 보통 유쾌하고 약간은 시니컬한 유머를 기반으로 흥미진진한 소재를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작품을 쓴다. 그런데 여기 실린 단편 중 「씻겨나가는 물」는 웃음기를 싹 빼고 줄곧 진지하게 전개되는데, 그 진지함에서 사뭇 다른 매력이 느껴진다.
이 책에서는 하인라인이 이렇게나 다채로울 수 있다는 걸, 그리고 넓은 스펙트럼을 거뜬하게 메울 수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2. 로버트 A. 하인라인, 『너희 모든 좀비는』
드디어 하인라인의 "우주사" 세계관에 속하는 중단편 시리즈를 전부 완독했다. SF의 전설과도 같은 작가라 궁금했는데, 이렇게 읽어보니 왜 전설인지 알 수 있었다.
이번 책에서는 하인라인의 유머 감각이 여실히 드러나서 좋았다. 특히 자신을 화자로 내세운 「현장 결함: 한 사이보그의 메모」는 하인라인스러운 상상력과 비야냥대는 유머가 돋보여서 재밌었다.
SF에서만 볼 수 있는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면서도 유쾌함과 진지함을 적절하게 섞는 능력이 정말 뛰어난 작가다. 무거운 주제도 마냥 무겁게만 풀어내지 않고 적절한 유머와 함께 인간의 힘을 믿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게 인상적이다.
중단편 모음집을 끝냈으니 다음에는 장편도 시도해보고 싶다. 황금가지 환상문학전집에 몇 권 있는 것 같던데 올해 민음사 패밀리데이에서 사려고 생각 중이다.
3. R. F. 쿠앙, 『양귀비 전쟁 1: 시네가드』
쿠앙은 지금까지 두 권 읽었는데 두 권이 모두 좋았어서 챙겨 읽는 작가인데, 마침 밀리에 이 책이 있길래 미서비스되기 직전에 다운받아 읽게 됐다.
제2차 양귀비 전쟁을 겪고 간신히 살아남은 니칸 제국에서, 전쟁 고아로서 구박받으며 살던 팽 루닌, 일명 "린"은 자길 마지못해 입양해 일만 시켜먹던 부부가 늙은 조사관의 아내로 보낼 거란 이야기에 탈출을 결심하게 된다.
린이 탈출의 방도로 생각한 건 바로 공부였다. 돈이 없는 린은 무료로 공부할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속한 성에서 최우수 성적을 거두어야만 하는 시네가드 학당을 목표로 하게 된다. 과연 린은 학당에 갈 수 있을까?
동양의 분위기와 문화를 대거 채용해오면서도 은은하게 현대 서양의 분위기가 섞인 게 인상적인 책이었다. 사서오경이 교재이지만 살벌한 무한 경쟁과 개인주의가 팽배한 환경은 묘하게 현대적이고 서양적이었다.
이 책에서 주인공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성격이 현실적이면서도 시원시원한다. 과하게 선하거나 용감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옳은 일을 하려고 하고, 이따금 인간적 고민에 휩싸이기도 하는 게 공감이 갔다.
다음 권이 너무나 기대되는 결말이라 2권도 곧 읽어보려고 한다. 아직 완결이 되지 않았다는데 언제 완결이 날지도 궁금해진다.
4. 김보영, 『고래눈이 내리다』
궁금했던 작가라 읽기 전 기대가 컸는데, 생각보다는 조금 실망이었다.
환경오염과 인간이 자연에 끼치는 폐해라는 주제의식만은 정말 명확하고, 단편 하나하나의 소재는 신선하고 흥미로웠지만 거의 모든 단편의 전개가 아쉬웠다.
단편은 빠르고 강하게 달려가며 여운이 긴 결말을 마지막에 내놓는 게 특징인데,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대부분 결말이 무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입부에서 흥미를 돋우는 능력은 대단하지만 그 흥미를 결말까지는 이어가지 못했다.
데이터로 이루어진 세상 속에서 인간만의 것을 찾아헤매는 인물들은 참 좋았지만, 결말에서 그 인간적인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찾아내는데에는 실패한 것 같다.
소재가 참 좋았어서 더더욱 힘빠지는 결말이 아쉬웠던 책이다. 하지만 소재들이 하나하나 다 좋아서 한 번 가볍게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5. R. F. 쿠앙, 『양귀비 전쟁 2: 출루 코리크』
1권을 읽을 때는 꽤 재밌고 괜찮은 판타지라고만 생각했는데, 2권을 읽으니 정말 훌륭한 판타지라고 생각이 바뀌었다.
『바벨』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그렇고 쿠앙은 현실 역사와 판타지를 섞어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세계를 만들어낸다. 현실의 역사가 반영되어 있기에 토대가 탄탄하고, 판타지가 섞여 있기에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서사를 탄생시킨다.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서도 판타지 특유의 상상력을 실험하는 책이라 정말 흥미롭고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1권과 달리 2권은 상황이 급박해지며 전개의 속도도 빨라지는데, 이 빠른 전개 속에서도 앞으로의 일을 안배하고 있다는 게 느껴져서 중간중간 놀랍기도 했다.
총 3부작이라 2편의 작품을 더 읽어야 하는데, 아직 번역본이 없어서 원서로 읽어야 할 것 같긴 하다. 빠르게 읽고 싶은데 번역본이 없어서 아쉽다.
6. 코니 윌리스, 『베스트 오브 코니 윌리스』
좋아하는 작가여서 꼭 이 책을 읽어보고 싶었는데, 실린 단편이 전부 좋았다. 읽어본 단편도 있었는데 다시 읽어도 재밌었다.
여러 단편 중 가장 좋았던 건 「여왕마저도」와 「모두가 땅에 앉아 있었는데」다. 「여왕마저도」는 여성의 월경을 회피 장치와 약으로 막을 수 있는 "해방"이 벌어진 이후의 세계를 다루는데, 그 와중에 월경은 축복이라며 그걸 막는 건 죄악이라는 사이클리스트라는 단체가 생겨난다. 주인공은 딸이 그 단체에 가입하자 말리려고 하는데 딸이 말을 안 듣는다. 이 단편은 SF이지만 현실과 많이 맞닿아 있어서 공감이 많이 갔다. 소재는 비현실적이지만 전개만큼은 모두가 공감할 만큼 현실적이라 좋았다.
「모두가 땅에 앉아 있었는데」는 외계인들이 지구에 찾아왔는데 경멸하는 눈으로 노려보는 것 외에는 몇 개월 동안 아무 소통도 하지 않아서 골치를 썩는 인간들의 고군분투를 다룬다. 외계인이 왔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신선한 소재로 생각지도 못한 전개를 보여줘서 재밌었다.
코니 윌리스의 세계는 소소하지만 유쾌하고 즐거워서 언제나 읽는 맛이 난다. 하지만 진지한 이야기도 능숙하게 풀어내서 반전 매력이 또 있다.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세계를 구축하고 세우는 능력이 탁월한 작가다. 정말 추천한다.
7. 로버트 A. 하인라인,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
코니 윌리스가 자신의 작품에서 혹은 작품 후기나 연설에서 계속해서 언급한 책이라 꼭 읽어보고 싶었는데, 마침 밀리에서 내려가기 전에 받아두어서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은 미국 어느 작은 마을의 평범한 고등학생 클리퍼드 "킵" 러셀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약간 특이한 아버지를 제외하면 아주 평범한 삶을 살고 있던 킵은 갑자기 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버지는 그럼 가면 된다며 갈 방법을 찾으라고 하고, 킵이 달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걸 도와준다.
킵은 달 프로젝트에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열심히 공부하지만, 대학에 가는 건 쉽지 않고, 대학에 간다 해도 그곳에서 뛰어난 인재로 살아남는 건 더더욱 쉽지 않다. 그래서 킵은 달에 가는 걸 상품으로 내건 비누 회사의 표어 대회에 참가하는데, 아쉽게도 조금 늦은 탓에 달 여행이 아닌 우주복을 상품으로 받게 된다.
킵은 그 우주복에 오스카란 이름을 붙이고 대대적으로 수리하며 정을 붙이지만, 대학에 갈 학비를 마련하고자 오스카를 팔려고 한다. 오스카를 팔기 전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오스카를 입고 산책에 나선 밤, 킵은 의문의 무전을 받고 웬 비행접시와 마주치게 되는데... 킵은 소원하던 달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아주 소소한 일상에서 시작해 점차 커져가는 스케일이 매력적인 책이다. 그저 달에 가고 싶을 뿐이었던 한 소년의 삶이 생각지도 못한 우주선과의 조우로 뒤바뀌는 과정을 유쾌하고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주인공 킵은 황당한 사건과 시련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절대 포기하지 않고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대단한 힘이나 능력으로 사건을 해결하지는 않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습이 인간답고 멋졌다.
하인라인의 책답게 상상력도 아주 뛰어났는데, 특히 여기에만 나오는 '엄마생물'이라는 존재에 대한 묘사가 특히나 좋았다. 과학적으로도, 문학적으로도 상당히 흥미롭고 신선한 묘사여서 즐겁게 읽었다. 또한 이 존재 외의 다른 과학적인 설정들이 탄탄해서 읽는 동안 위화감 없이 술술 읽을 수 있었다.
하인라인은 단편도, 장편도 잘 쓰는 작가라는 걸 이 책을 통해서 느꼈다. 앞으로 하인라인의 책이라면 무엇이든지 믿고 읽으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