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2권
부엔디아 가문의 폭풍 같은 100년의 역사가 때로는 흥미롭게, 때로는 서글프게 서술되어 있는 책이다.
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고독함 속에서 살아간다. 가문의 시조라 할 수 있는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연금술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며 고립된다. 그의 부인 우르술라는 한때는 집안의 큰 어른이었지만 점차 뒤로 밀려나며 서글픈 고독을 맞이하게 된다. 그들의 아들인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는 삶을 살며 비인간적인 고독에 빠져들고, 어릴 때 부엔디아 가문에 맡겨져 딸처럼 키워진 레베카는 남편의 사망 이후 고립을 택한다.
이들의 고독은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가문이 끝나갈 때까지 이어진다. 모두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모두 이해받지 못하며, 모두 고독 속에서 살아간다. 반복되는 근친상간은 부엔디아 가문 자체의 고립과 고독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각 인물들의 삶에 장애물로 작동하며 개개인의 고독을 심화시킨다.
마르케스는 직선으로 나아가는 현실의 시간선과 원형으로 맴도는 마콘도의 신화적 시간선을 때때로 충돌시키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비슷한 일과 비슷한 사람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며 일종의 순환적 세계를 이루는 마콘도에서는 신화적인 일들이 무리없이 일어난다. 현실과의 경계가 아주 분명하고, 오로지 그들만의 고립된 세계를 구축한다. 하지만 그런 마콘도에도 이따금씩 현실의 사건들이 침입하며 원형으로 돌아가던 시간선을 나선으로 비틀어버린다. 반복되던 일에 아주 작은 차이들을 만들어내고,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오며 빙빙 돌던 시간선을 끊고 새롭게 뻗어가게 만든다.
처음에는 경악할 만큼 막 나가는 전개와 광기 어린 인물들, 그리고 이 조합을 아주 태연자약하게 다루는 작가에게 놀라서 빠르게 읽게 되지만, 읽다 보면 그 안에 담긴 깊이와 주제에 놀라서 음미하며 천천히 읽게 된다. 마르케스가 전설적인 작가로 추앙받는 이유를 분명하게 알게 되는 책이라 추천한다.
2. 찰스 킹, 『흑해』
같이 교환독서하는 분들과 독서모임 지원 이벤트에 참여했다가 선정되어서 읽게 된 책이다.
역사, 특히 세계사를 좋아해서 꼭 읽어보고 싶었던 책인데, 생각보다 훨씬 흥미롭고 재밌었다. 초반부의 용어 설명이 조금 어려워서 잠깐 주춤했지만, 본격적인 역사를 다루기 시작하니 정말 흥미진진하고 좋았다. 흑해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 즈음에 있는 바다라고만 생각했고, 왠지 변두리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흑해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 위치하기에 각 대륙을 잇는 역할을 했다. 그리스와 로마 제국의 중심이자 상대적으로 얕고 잔잔한 지중해와는 달리, 수심이 깊고 변덕스러운 바다였지만 두 대륙을 잇기에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바다였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며 환대하는 바다라 부르기도 했다. 흑해는 유럽과 아시아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수많은 민족과 정체성이 만나고 충돌하는 장으로서 기능했다.
민족이 워낙 다양하다보니 흑해 지역의 사람들은 민족성보다는 종교를 중심으로 뭉쳤다. 기독교도와 무슬림, 유대교인처럼 민족에 관계없이 자신이 가진 종교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현대로 오며 민족 간의 갈등이 격렬해져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고, 지금도 국가 간의 다툼과 전쟁이 치열한 곳이 되고 말았다.
흑해는 항상 변화무쌍한 곳이었다. 해류부터 사람들, 국가까지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기보다는 움직이는 곳이었다. 그래서 흑해는 격렬한 전쟁의 장이 되기도 했고, 활기찬 무역의 장이 되기도 했다. 그런 흑해에 얽힌 역사는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기에 정말 복잡하지만 정말 흥미롭다.
복잡한 역사를 가진 흑해를 다루고 있지만 문장이 간결하게 쓰여 있고, 굉장히 친절한 책이라 세계사에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길 추천한다.
3. 크리스티나 로세티, 『고블린 도깨비 시장』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 소개된 작품인데, 『다락방의 미친 여자』에서 제시한 해석이 굉장히 흥미로워서 꼭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다.
로세티의 첫 시집을 번역한 책인데, 개별적인 시들로 이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시 전체가 유기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고 느꼈다. 전반부는 통통 튀는 재기발랄하다면 후반부는 종교적인 분위기가 짙고 진지해지기에 서로 상당히 다른 느낌의 시들이지만 일종의 통일성이 있었다.
내가 본 전반부는 문학과 시를 사랑하고 재치 있게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소녀가 여성의 글쓰기를 반대하는 사회와 부딪히는 것이 큰 내용이었다. 그만큼 도전적이었고, 재치가 넘치는 시들이 많았다. 로세티는 문학을 하고 싶어 하는 소녀의 크나큰 열망과 꿈, 그리고 이를 가로막는 것들을 대화체의 시에 담아낸다.
세상은 소녀의 재능을 그리 반기지 않는다. 자신을 드러내며 글을 쓰는 여성은 세상이 원하는 여성이 아니었기에 환영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녀는 굴하지 않고 반짝반짝 빛을 내며 통통 튀는 시들을 써나간다. 세상이 그런 자신을 말려 죽일지라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지라도.
그래서 전반부의 시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조여드는 느낌과는 달리 느슨하게 풀어진 느낌이 강하다.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고 싶은 소녀의 열망이 시를 통해서 드러난다. 세상은 그런 소녀를 자꾸만 땅에 매어두려고 하지만, 소녀는 결코 쉽게 붙잡히지 않는다.
반면 후반부는 세상과의 충돌을 겪은 소녀가 한층 더 성장해 본인만의 굳은 신념을 가진 여인이 된 것 같았다. 종교적인 주제가 많이 나오지만, 내게는 기독교 그 자체라기보다는 시인의 신념 그 자체로 느껴졌다. 세상과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지켜낸 시인의 자리와 문학에 대한 열정을 종교적 열정으로 표현했다고 느꼈다.
재기발랄하던 소녀는 세상과의 수많은 충돌을 통해 반짝이던 빛은 조금 쇠했지만, 대신 단단해지고 강해졌다. 전반부의 소녀는 반짝이며 통통 튀긴 했지만 조금은 약해보이고, 아슬아슬해보였어. 세상에 맞서고는 있지만 과연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후반부로 들어서며 그 소녀는 강인한 여인이 되어 자신의 신념을 굳게 지켜낸다. 자신만의 글을 쓰겠다는 신념을 마음 속에 품고, 여전히 자신을 못마땅해 하는 세상에 맞서 꿋꿋하게 버틴다. 그 누가 뭐라 할지라도, 자신의 재능은 절대 말라 죽지 않고 꽃을 피울 거라며, 자신을 옭아매려 할지라도, 자신은 훨훨 날아 자유로이 세상을 누빌 것이라며.
자신의 모든 열정을 시에 꾹꾹 눌러 담아내는 로세티와 그녀의 시가 보여주는 재기발랄함이 정말 매력적인 책이다. 게다가 구어체를 이용한 번역을 통해 로세티 특유의 재기 넘치는 말맛을 살린 정은귀 번역가의 번역이 유독 돋보여서 추천한다.
4. 어슐러 K. 르 귄, 『내해의 어부』
르 귄의 책은 무엇이든지 간에 꼭 읽으려고 하는데, 시공사에서 나온 걸작선 중 안 읽어본 책이라 이번에 읽게 됐다.
이 책에는 SF에 대한 서문과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 중 마지막 3편은 헤인 연대기에 속하는 것들로 앤서블에 이은 처튼이라는 새로운 현상을 주제로 하고 있다.
처튼이 정말 흥미로운 개념이라 나는 마지막 세 단편들이 가장 재밌었다. 처튼은 일종의 순간이동으로, 단 1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는 이동을 할 수 있다. 이게 가능한 원리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처튼을 가능케 하려면 이를 행하는 이들의 상호 합의가 필요하다.
처튼을 통해 가고자 하는 곳이 있는데, 처튼을 하는 사람들이 각자 도착지에 대해 다르게 생각한다면 이들은 무의 공간에 떨어진다. 지능이 있는 존재의 사고가 처튼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명이 한다면 꼭 이들이 도착지에 대해 동일한 생각을 갖고 하나의 합의된 세계를 구축해야만 한다.
순간이동을 하기 위해서는 모두의 합의가 필요하다는 게 정말 신선하고 재밌었다. 시간은 절대적 흐름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합의한 거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앤서블처럼 처튼도 통념에 도전하는 개념이라 흥미로웠다.
시간이 걸리지 않고 여행을 한다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이 여행을 하는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기로 합의한다면, 그래서 동일한 어느 세계에 가기로 마음 먹는다면, 합의에 따른 새로운 세계가 존재하게 된다는 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설득되는 논리였다.
르 귄답게 좋은 문장들과 새로운 아이디어들, 그리고 또 다른 놀라운 개념을 소개하는 게 정말 좋은 책이라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