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이스 캐롤 오츠 외, 『조각나고 찢긴,』
문학수첩 서평단에 선정되어 읽게 된 책인데, 조이스 캐롤 오츠와 마거릿 애트우드의 단편이 실려 있다고 해서 꼭 읽어보고 싶었다. 내가 잘 못 읽는 호러, 그 중에서도 바디 호러 장르의 단편들이라고 해서 읽기 전에 긴장을 많이 했는데, 생각보다 점프 스케어 타입의 호러는 없었고 약간 서늘한 느낌이라 읽기 좋았다.
이 책은 잔인하고 무서워서 호러 장르에 속한다기보다는 현실적인 공포를 보여줘서 무섭다. 딱 하나의 단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성을 화자로 하고 있고, 모든 단편이 여성의 신체를 억압하는 사회와 맞닿아 있다. 강요받은 아름다움에 자신을 맞추려고 일생을 허비해버린 여성들, 꿈과 재능이 있음에도 사회의 이상에 맞지 않아 꿈을 이루지 못한 여성들, 자신의 신체를 침범당하고 빼앗길까봐 두려워하는 여성들이 단편 곳곳에 등장하며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을 서늘하게 그려낸다.
대부분의 단편은 초현실적인 혹은 초자연적인 요소를 갖고 있는데, 그런 판타지적인 설정으로 묘사하는 공포는 절대 가상의 것이 아니라 더 무섭다. 오히려 너무나 현실적인 공포이기에 비현실적인 상황을 통해 그려지는 게 더욱 더 충격적이고, 공포스럽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런 상황이 주는 공포는 현실에 지금 존재한다는 것이 목덜미를 서늘하게 했다.
한번 크게 놀래키고 마는 스타일의 공포가 아니라 서서히 스며들며 사람을 죄어오고, 읽고 나서도 진득하게 여운을 남기는 작품들이라 책을 덮고 나서도 곰곰히 생각하게 되는 책이다. 과연 사회는 여성에게 어떤 모습을 강요하고 있는지, 그런 사회 속에서 여성들이 겪는 공포와 두려움은 무엇인지 고찰하는 책이라 추천한다.
*문학수첩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2. 이레네 바예호, 『갈대 속의 영원』
책에 대한 책이라는 말에 이끌려 사게 된 책인데, 두께가 꽤 있는 논픽션인데도 불구하고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내용은 깊지만 문체가 이해하기 쉬워서 좋았던 책이다.
이 책은 아주 먼 옛날, 책이 처음 탄생한 순간부터 책이 넘쳐나는 현대를 넘나들며 책의 역사와 존재의 의미를 고찰한다. 책이라는 게 아주 희소해 왕이나 부자들만 가질 수 있던 물건이던 고대부터 두루마리 형식을 탈피하고 페이지 형식으로 넘어간 중세, 디지털과 종이 나눌 것 없이 수없이 많은 책이 나오는 현대를 물흐르듯 매끄러운 문체로 서술한다.
책은 누군가의 기억이기도 하고, 한 세계를 담은 그릇이기도 하고, 어느 한 시대를 묘사한 그림이기도 하다. 책이라는 것 안에는 한 시대의 정신과 가치와 생활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런 책은 오래도록 살아남아 후대에 전해지며 그 나름의 지혜와 사실을 물려준다.
어딘가에 활자로 내용을 남겨둔다는 건 인간에게는 혁신적인 사건이었다. 모든 걸 기억할 필요가 사라지고, 어떤 것을 적어둔 것의 위치만 기억하면 되니까. 하지만 책의 효능은 기억의 측면에만 그치지 않는다. 책은 한 사람을 절망에서 구제하기도 하고, 드넓은 세계를 보여주는 창구가 되기도 하며, 삶을 살아갈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한다.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도 글을 썼던 빅터 프랭클처럼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실 책을 읽고 쓴다는 건 고대에는 특권이 아니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노예나 책을 읽고 쓰지, 자유민들은 노예가 읽어주는 책을 듣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다 중세로 들어서며 글을 안다는 건 일종의 특권이 되었다. 문해력의 지위가 서로 다른 시기이지만, 이 모든 시기를 통틀어 동일했던 건 여성은 글을 쓰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여성의 삶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유년시절을 친정에서 보내고 사춘기가 되면 가문 간의 거래에 따라 남편과 결혼하고, 그 뒤로는 노예는 아니지만 남편의 뜻에 매여 살아갔다. 이런 틀을 거부하고 글을 쓴 여성들은 비난받았다. 하지만 꿋꿋이 글을 쓰고 책을 남긴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는 당시 여성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책을 가질 수 있고 읽을 수 있다는 게 보편화된 건 꽤나 최근의 일이지만, 그 오랜 세월 동안 많은 고비를 넘기면서도 책은 살아남았다는 걸 작가는 애정어린 시선으로 보여준다. 현재 우리 곁에 아주 흔한 물건으로 존재하지만, 실은 그렇게 되기까지 아주 복잡한 역사와 시간이 있었다는 걸 아름답고 명료한 문체로 읽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책을 더 사랑하게 된다. 책에 대해 굳은 믿음과 사랑을 보여주는 책이라 정말 추천한다.
3. 요아힘 마이어호프, 『죽은 이는 모두 날아오른다』
소전독서단 3월 도서로 고른 책인데, 최근 인스타그램에서 종종 눈에 띄어서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다.
에피소드 형식의 책이라고 해서 약간은 가볍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집어들었는데, 의외로 무거운 분위기의 이야기를 다뤄서 놀랐다. 작가의 삶을 반영한 소설이라 작가는 과연 어떤 삶을 산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과 의사로서 정신병원의 원장인 아버지를 따라 정신병원에서 사는 요아힘의 가족들은 어딘가 독특하다. 요아힘의 두 형은 때로는 짓궂지만 활달한 편으로 특이할 건 없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는 항상 아슬아슬해. 사이가 좋다가도 때로는 싸늘하다.
정신병원에 산다는 것과 끈기가 약한 성격 탓에 요아힘은 학교에서도 조금 겉돌지만, 그럼에도 꽤나 행복하게 유년시절을 보낸다. 정신병원에서 산다는 게 평범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린 요아힘에게 정신병원은 고향의 일부였고, 집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눈으로 바라본 정신병원과 그 안의 환자들, 그리고 자신의 가족들은 때로는 환상적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다 크고 나서야 유년 시절에는 똑바로 보지 못한 것들을 마주하게 되기도 한다. 어릴 때는 결코 이해하지 못하던 것들을 다시 회상하며 이해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스필버그의 <파벨만스>가 많이 생각났다. 너무 솔직하다 싶을 만큼 가족의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는 것이 특히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완전히 장악해 이야기꾼의 시점에서 새로이 재구성한 서사를 써나가는 스필버그와 달리 마이어호프는 범상치 않은 가족의 사연에만 기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조정하고 재구성해 자유자재로 갖고 논다기보다는 이야기에게 끌려가며 약간의 소설적 허용이 있는 에세이를 쓰는 것 같달까. 소설인데 소설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지 않았다. 그만큼 진솔해보인다는 장점이 있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만큼 이야기를 소설답게 만드는 것에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는 단점이 있기도 하다.
책 자체는 재밌었지만 어딘가 구성이 부족하고, 인물들에 기대어 이야기를 추진하려는 게 아쉬웠다. 궁금하다면 한 번 읽어볼 만은 하지만 굳이 읽으라고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읽는사람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4. 박대겸, 『외계인이 인류를 멸망시킨대』
한 달에 한 번하는 독서모임에서 읽기로 한 책인데, 사자니 내 취향이 아닐 것 같아서 오전에 도서관에 가서 읽었다.
일주일 후에 인류를 멸망시키겠다는 외계인의 등장과 이에 상관없이 나는 나의 삶을 살겠다는 주인공은 흥미로웠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줏대 있어 보이던 주인공은 갈수록 흔들리는 데다 밋밋하고 납작해보였고, 외계인은 초반의 신비로운 이미지가 무색하게도 무색무취의 존재로 남아버렸다.
통통 튀는 매력의 SF를 기대했는데 그다지 가볍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게감 있지도 않았다. 대학생이라는 주인공은 말투와 행동이 중년 같고, 인물들의 대화는 생동감이 하나도 없고, 끝없이 나오는 과학적 원리들은 몰입을 방해했어. 하드 SF가 되기에는 한참 부족하고, 그렇다고 유머러스한 소프트 SF가 되기에도 한참 부족하다.
이도저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결말을 보면 낫지 않을까 싶어 쭈욱 읽어나가다가 만난 결말은 정말 용두사미 그 자체였다. 내가 이걸 보려고 이 책을 여기까지 읽었나 싶었다. 스포가 될 요소를 최대한 빼고 말하자면, 이 책을 덮는 순간 이 책이 파동-입자의 형태로 존재해서 내 눈에 보이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은 과학적 설정을 남발하며 이야기를 어울리지 않게 진지하게 만들고, 인물들의 성격과 말투를 모두 비슷하게 만들어 현실감이 떨어진다고 느낀 책이라 나는 웬만하면 읽지 말라고 추천하고 싶다. 특히나 SF 장르의 팬이라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