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1.
오늘도 하늘에는 도넛이 떠 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떠 있는 도넛과 그 가운데 구멍에서 빛나는 태양은 이제는 익숙해진 광경이다. 처음 볼 때는 하늘이 어두워진 것 같아 불안하고 낯설었지만, 5년 넘게 같은 하늘을 보고 있으니 두려움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익숙함이 채웠다. 이제는 안 보이면 불안할 것 같달까. 출근하는 길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도넛과 그 사이로 보이는 태양을 찾는 게 아침의 습관이 되었다.
도넛이 지구의 하늘에 떠 있게 된 경위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그걸 알아내는 게 지난 4년 동안의 나와 내가 속한 팀의 임무였지만, 아직 진전이 없다. 5년 전에 뜬금없이 나타난 도넛 모양의 우주선은 그저 하늘에 떠 있었다. 외계와의 첫 만남이라 할 수 있는 이 우주선은 순식간에 관심의 중심이 되었고,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추측을 내놓았다. 그중 가장 인기 있던 추측은 우릴 죽이러 왔다는 거였다. 영화에나 나오던 외계 침공이 현실이 됐다는 생각이 든 사람들은 식료품을 사재기하는가 하면 곧 죽을 거 있는 돈 없는 돈 펑펑 쓰고 죽자는 식으로 생활하기도 했고, 외계 침공은 신이 내린 처벌이라며 모두 회개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첫 1년 동안 세계 정부는 침공론을 잠재우느라 우주선에는 신경도 못 썼다. 하마터면 국제 경제가 휘청일 정도였으니, 다들 고생 좀 했을 거다.
1년 동안 가만히 있는 우주선을 보며 우리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다는 걸 사람들이 확신하자 외계 침공론이 불러일으킨 광란은 자연스레 사그라들었고, 정부는 조사단을 꾸리겠다고 발표했다. 과학자 30명과 인문학자들 10명으로 이루어진 팀으로, 과학자들은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소통을 맡아 영상을 송출하고 메시지를 발신하는 법을 연구했다. 인문학자들은 과학자들이 영상이나 메시지에 실을 내용을 고민하고 연구했다. 초반에 이 조사단은 큰 관심을 받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별다른 성과가 나오지 않자 사람들의 관심은 시들해졌다. 하늘에 우주선이 떠 있는 것에 나름대로 익숙해진 사람들은 이윽고 가운데가 둥그렇게 비어 있는 타원형의 우주선에게 '도넛'이라 이름붙이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우주선은 도넛이 되었고, 삶의 일부가 되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우리를 내려다보는 도넛은 자연 풍경의 일부가 되었고, 풍경의 일부가 된 도넛에 사람들은 점차 관심을 잃어갔다.
나는 SF 장르가 각광받는 현대 문학을 주로 연구하는 문학 전공자로서 팀에 합류했고, 다들 내게 거는 기대는 크지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여기 합류를 제안받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책 속에나 나올 일이 벌어졌으니 책을 읽은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게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겠지...? 실제로 내가 할 만한 일은 많지 않았다. 도넛 라디오를 제외하면 논문과 소설을 읽고 도넛과 비슷한 우주선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찾아 헤매는 게 전부였는데, 놀랍게도 대부분의 우주선은 무슨 행동이든 했다. 최소한 그 안에 탄 선원들이 모습이라도 드러냈다. 도움이 될 만한 건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늘 연구 본부로 출근해 도넛을 바라보며 책을 읽거나, 언어학자들이 도움을 청하면 같이 연구 결과를 정리해주거나 논문을 읽고 정리해주었다. 내가 할 일은 늘 많지 않았고, 온갖 SF를 섭렵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내가 SF의 전문가가 되어가는 동안, 도넛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세계의 온갖 언어로 메시지를 보내도, 바디랭귀지를 담은 영상을 보내도, 심지어 그림을 보내도 도넛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우리가 직접 접촉하려고 도넛에 접근해도 도넛은 늘 그랬듯이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정말이지 무슨 행동이라도 보이면 좋을 텐데 도넛은 우리의 처절한 노력이 무색하게도 얌전히 떠 있었다. 안에 누가 있긴 한 건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에 나오는 외계인들처럼 해석할 만한 뭐라도 보여주면 좋을 텐데, 도넛은 그저 도넛으로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마지막 출근날이 다가왔다. 진전이 보이지 않는 조사에 정부는 드디어 조사를 끝내고 도넛 사태를 그냥 자연 현상으로 받아들이기로 정했다. 사람들이 위협을 느끼던 때도 지났고 들인 돈에 비해 결과도 나오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정이긴 했지만, 5년 간 하던 일을 그만두려니 괜히 아쉬웠다. 5년 내내 아무 말도 안 해준 도넛에게 섭섭한 마음도 들어 바쁘게 출근길에 나서며 더 이상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머리 위에 떠 있는 도넛을 의식하며 걸었다. 도넛 사태의 5년째 되는 날이자 조사단의 마지막 날을 맞이한 오늘, 조사 본부에는 과학자 세 명과 나를 포함한 인문학자 두 명만이 남아 있었다. 벽창호 같은 도넛을 상대하다가 지쳐서 절반 이상이 1년 만에 관뒀고, 나머지도 천천히 관두기 시작했다. 우리는 저마다의 이유로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들이었다. 천체물리학자 이안은 눈치 안 보고 연구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생물학자 혜린은 언젠가는 외계의 생명체를 보고야 말겠다는 집념 때문에, 공학자 민강은 조용한 환경과 나쁘지 않은 보수 때문에, 언어학자 라희는 집과 가깝고 여러 가설을 시험해볼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영문학자인 나는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남아 있었다. 초기에는 각자의 분야가 다르다보니 접점이 많지는 않았지만, 점점 줄어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4년을 함께 버텨냈다는 것 때문에 느슨한 유대감이 생겼다. 오묘한 동지애랄까.
나는 마지막 날이지만 마지막이 아닌 것처럼,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다. 아침 아홉 시부터 열한 시까지 하는 도넛 라디오를 준비하며 오늘 읽을 부분을 체크하고 시간을 계산해 결말까지 읽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도넛이 우리가 하는 말을 알아들으려면 공부할 표본이 필요할 테니 표본도 제공하고 서로 친해질 겸 내가 책을 낭독하는 걸 방송하면 어떨까 싶어 조사단 초기에 제안한 게 도넛 라디오였다. 대부분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찬성했고, 나는 아무도 방송 장비를 사용하지 않는 시간대인 오전 시간을 얻어냈다.
처음 라디오를 준비할 때는 책을 고르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우선 지구를 침공하려는 외계인이 나오는 책은 배제했다. 괜히 듣고 우릴 공격하려 하면 안 되니까. 외계인을 괴물로 그리는 책도 뺐다. 굳이 도넛을 기분 나쁘게 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렇게 하나하나 빼면서 고른 책이 바로 『프로젝트 헤일메리』였다. 외계인과 인간 사이의 우정을 다루고, 공동의 적에 맞서는 이야기라니 친선 목적에 딱이라 생각했다. 내가 낭독하는 걸 누군가가 들을 거라 생각하니 사실 좀 떨리긴 했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내 말을 못 알아들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차분해져서 천천히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그렇게 나의 도넛 라디오가 시작되었다.
도넛 라디오는 조사단 사이에서도 꽤나 인기였다. 조용한 내 목소리 덕에 일할 때 잔잔하게 틀어놓기 좋다나. 나는 조사단 사이에서 도넛 리더기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누가 붙인 별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다들 나를 리더기라 부르기 시작했다. 도넛 조사단 공식 리더기가 된 나는 영구에는 그다지 필요없는 문학자로서 다른 사람들의 이런저런 조사 업무를 돕던 전과는 달리, 라디오에서 읽을 책을 고르고 준비하는 데에 내 시간을 온전히 쓸 수 있었다.
단 한 번도 응답하지 않는 도넛과 내가 읽은 책은 점차 쌓여갔다. 처음에는 내가 읽어주는 책 때문에 생각이 바뀌어 공격하면 어쩌나 싶어 『프로젝트 헤일메리』, 『야생 조립체를 위한 찬가』, 『수관 기피를 위한 기도』, 『구르브 연락 없다』와 같이 서로 다른 존재들 사이의 우정이 중요하게 나오거나 무해한 외계인이 나오는 책들을 읽어주었다. 그런데 라디오를 한 지 1년이 지나도 아무 일이 안 일어나서 그 뒤로는 내가 좋아하는 걸로 골라 읽었다.
내 계획은 도넛을 지구 SF의 전문가로 만들어주는 거였다. 그러러면 읽어야 할 책이 꽤 많았지만, 듄 시리즈나 파운데이션 시리즈 같은 거는 너무 길어서 뺐다. 하지만 르 귄, 애트우드, 하인라인, 브래드버리, 클라크와 같은 작가들의 대표작은 읽을 수 있었다. 도넛이 내 계획을 마음에 들어 할지는 모르지만, 뭐, 마음에 안 들면 말을 하겠지. 도넛과 나는 『로캐넌의 세계』, 『시녀 이야기』, 『화씨 451』, 『달을 판 사나이』, 『유년기의 끝』과 같은 책들을 읽어나갔다. 무엇을 읽어주든 도넛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도넛이 뭐라도 말했으면 싶다가도 가끔은 도넛이 답을 하면 무서울 것 같기도 했다. 매일 말도 안 하던 사람이 말을 한다는 건 엄청난 이유가 있는 걸테니까. 그래서 도넛이 말을 하지 않는 건 불만은 없는 거겠지.
마지막으로 읽을 책은 신경 써서 골랐다. 르 귄의 『빼앗긴 자들』이었는데, 마지막 결말이 지금 도넛과 우리 사이에 꽤 잘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선택한 책이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책이기도 했고. 아홉 시에 방송을 해야 하는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일찍 출근해야 했고, 그래서인지 다들 출근하면 나한테 와서 인사를 건네는 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오늘 읽을 부분을 다시 한번 훑어보고 있는데 언제나 두 번째로 출근하는 라희가 다가왔다.
"안녕, 리더기. 오늘 마지막 라디오겠네? 마지막이라 떨려?"
아무래도 리더기란 별명은 라희가 붙인 것 같단 말이지. 다른 사람들이 부를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직접 별명을 지은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아우라 같은 게 있다.
"떨리진 않는데, 뭔가 서운하네. 도넛하고 한 번은 대화할 수 있을 줄 알았어."
"도넛도 징글맞지, 나 같으면 성질머리 때문에라도 응답했어. 아니 어떻게 5년 동안 가만히만 있지? 완전 새로운 데에 왔으면 구경 해보고 싶지 않나? 갑갑한데 우주선에만 있는 게 말이 돼?"
"돌아다니는 거 싫어하나보지. 나처럼."
"그런 것 치고는 너무 멀리 오지 않았나? 이안이 말하기로는 우리은하 밖이나 아님 끄트머리에서 온 것 같다던데. 돌아다니는 거 싫어한다기엔 여행을 멀리 온 것 같아. 아, 요즘 읽어주는 책 좋더라. 나중에 종이책으로 사서 다시 보려고. 그럼 라디오 잘해. 난 짐 정리하러 간다. 이따 보자고."
라희는 휘적휘적 손을 흔들고는 자기 자리로 갔다. 우리는 친밀하다기엔 뭔가 애매했지만 그래도 조사단에선 라희와 가장 친했다. 현재 인문학자라곤 우리 둘밖에 없기도 하고, 라희 특유의 털털한 성격이 잘 맞기도 했다. 그 털털함이 가끔은 짜증나기도 했지만. 조사단이 끝나도 라희와 계속 연락을 하며 지내게 될지 생각하는 동안 민강이 왔다.
"좋은 아침이야, 리더기. 마지막 라디오인데 파이팅이다."
조사단이 끝나서 아쉽긴 하지만 저놈의 리더기 소리는 안 아쉬울 것 같다. 기분이 나쁘다기엔 좀 부족한데, 그렇다고 듣기 좋지는 않단 말이지. 내가 고맙다는 말을 미처 하기도 전에 민강은 이미 저만치 가 있었다. 걸음 참 빠르단 말이야. 민강은 연구할 때와 평소의 성격이 많이 달랐다. 연구할 때는 참 차분한데 평소에는 성격이 급하다. 인사를 하면 답인사를 받기도 전에 이미 저 멀리 가 있다. 저 성격에 어떻게 그 조그만 기계를 만지고 고장을 안 내는지 난 도통 모르겠다.
"어이 리더기, 오늘도 일찍 나왔네?"
이안이다. 저 녀석은 맨날 어이 리더기라 부른단 말이지. 사실 이안은 누구든지 간에 어이를 붙이긴 한다. 어이 라희, 어이 민강 이렇게. 내 별명이 리더기면 이안의 별명은 어이가 되어야 할 정도다.
"라디오하려면 일찍 나와야지."
"그렇긴 하지. 그럼 라디오 열심히 해."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이안이 가면 지각을 간신히 면할 시간에 후다다닥 뛰어들어오는 혜린이 온다. 마지막 날은 좀 일찍 올까 했는데 여전하군.
"나 안 늦었지? 그치? 그렇다고 해줘..."
"안 늦었어. 1초 남기고 도착했네."
버저비터를 누르듯 언제나 1초를 남기고 뛰어들어오는 혜린을 보면 신기하다. 항상 출근 시간 1초 전에 오는데 그렇게 타이밍 맞추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하, 다행이다. 차를 눈앞에서 놓쳤지 뭐야."
혜린은 내 책상을 보다가 곧 라디오 시간이라는 걸 깨달았나보다.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참참, 리더기 너 라디오 해야 하지? 나 갈게! 파이팅!"
혜린은 들어올 때처럼 빠르게 뛰어서 사라졌다. 언제 봐도 정신 없지만, 그래서 귀엽기도 하다.
혜린까지 출근하고 나니 라디오에 들어갈 시간이 되었다. 라디오를 시작하기 전, 책상을 정리하려다가 잠깐 내 뒤에 놓인 책장을 돌아보았다. 꽉 차 있던 책장이 텅텅 빈 걸 버니 마지막인 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월급도 괜찮고 업무도 널널하고 좋았는데. 창 밖으로 보이는 도넛도 좋았고. 마지막이란 걸 곱씹으며 나는 라디오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도넛. 오늘의 라디오를 시작할게요. 오늘은 『빼앗긴 자들』 11장부터 13장까지 읽고 마무리하려고 해요. 그럼 시작합니다."
"'그는 우라스에 도착했을 때와 똑같이 빈손으로 아나레스에 도착할 것이었다. 그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고, 가져갈 것도 없었다. 가방도 없었고 옷도 입은 것뿐이었으며, 이름조차 아나레스의 중앙 컴퓨터가 골라준 것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도넛은 조용했고, 내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며 연구실도 고요했다. 이 시간이 그리워질 것 같아 책을 읽어나가는데 괜시리 슬펐다.
"'... 지면은 어둡고 황량했지만 고개를 들어 구름 사이를 보자 별들이 총총히 떠 있었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본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를 환영해 주었다.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니 섭섭해졌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4년 간의 시간이 허무하게 느껴져 나는 그러면 안 될 거란 걸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감지했으면서도 도넛에게 하고 싶던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오늘로 도넛 라디오도 끝이네요. 지난 4년 동안 같이 읽어서 즐거웠다고 하고 싶은데, 같이 읽었다고 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당신들이 듣고 있었는지, 아니, 알아듣기는 한 건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사실 조사가 완전히 끝을 맞이하기 전에 한 번은 말을 해줄 거라 생각했어요. 뭐라도, 진짜 아주 사소한 거라도요. 책이 재밌었다든지, 듣기 싫으니 그만 하라든지, 뭔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든지 뭐 그런 거요. 근데 정말 한 마디도 안 하고 모습도 보여주질 않네요. 나름 4년 동안 저는 정도 들었는데."
나는 여기서 잠시 숨을 골랐다. 더 말하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여기서 멈추는 것도 이상하고. 잠깐 고민한 후 나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조금 섭섭했어요. 저만 당신들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 건가 싶어서. 근데 또 일방적으로 우정과 소통을 강요한 건가 싶어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요. 책을 읽어준 게 부담스러웠을지도요. 그런데요, 만약 당신들이 뭐라도 말했다면 우리는 당신들의 말을 배우려고 애썼을 거예요. 당신들이 말도 안 하고 모습도 안 보여서 우리 말이라도 듣고 배워달라고 읽어준 거지, 우리의 언어를 강요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러니깐 우릴 너무 미워하진 말아요. 우릴 미워해서 말을 안 하는 거라면 이해할게요. 그렇지만 밉다고 해서 막 공격하거나 하진 말고요. 우리 지금까지 같이 잘 지내왔잖아요? 인간들 중 하나인 제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인간한테 기분 나빠하면 안 돼요. 그냥 오랫동안 당신들이 제 삶의 일부였어서 떠나보내려니 허전해서 그래요. 그럼,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가 같이 읽은 책의 구절을 인용하며 라디오를 마칠게요. "우리가 당신들에게 올 수는 없어요. 다만 당신들이 우리에게 오기를 기다릴 수 있을 뿐입니다." 당신들이 우리에게 오길 기다리며, 마지막 인사를 전합니다."
망했다 싶었지만 속은 시원했다. 답답함을 마음 한 켠에 품고 사는 것보단 이게 낫겠지. 설마 5년 동안 가만히 있던 도넛이 이 말 몇 마디에 마음을 바꾸겠어. 알아들었을지도 확신할 수 없는데.
나는 기지개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점심 시간이니 짐이나 싸둘까. 그동안 조금씩 옮겨둬서 별건 없지만, 자잘한 필기구 같은 것들은 당장 쓸 펜 한 자루를 빼고는 다 가방에 넣어뒀다. 책도 지금 읽을 거 한 권 빼고는 싸두고 책상 위를 정리하고 자리를 조금 치웠더니 어느새 점심 시간이 다가왔다.
보통 점심 시간은 각자 알아서 보내지만, 오늘은 마지막이니 특별히 다 같이 모여 시켜먹기로 했다. 사람이 다섯 명이라 취향도 제각각이어서 메뉴가 다양했다. 점심을 먹으며 우리는 마지막으로 도넛에 대한 가설을 나누었다.
도넛에 대해 확인된 건 몇 가지 뿐이다. 우리은하 밖에서 왔거나 밖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먼 끄트머리에서 왔다는 것. 5년 동안 떠 있는 걸 보아 자체적으로 연료를 생산할 여력이 있다는 것. 지구에 오긴 했지만 지구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것. 그 외의 모든 것은 미지수였다. 우리랑 비슷하게 생겼는지도 알 수 없고 말을 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다.
"확실해. 호흡하는 공기가 우리랑 달라서 안 내려오는 거야. 내려오면 죽을지도 모르는 거지. 그러지 않고서야 지금까지 가만히 있을 리가 있어?"
혜린이 말했다. 생물학자다운 추측이었다. 혜린은 연구 초기부터 이 가설을 밀었다. 도넛도 여기 연구하러 왔을 텐데 코빼기도 안 비출 이유는 단 하나, 생물학적 이유라고 말이다.
"근데 우주를 건너 왔을 정도면 우주복은 있을 거잖아. 그정도 대비도 안 하는 생명체가 우주선을 만들어 은하를 왕복한다는 게 말이 돼?"
이안은 혜린이 저 가설을 내세울 때마다 똑같이 반박했다. 둘의 말을 듣다보면 둘 다 설득력이 있어서 남은 셋은 늘 둘의 토론을 지켜보기 바빴다. 쟤 말을 들으면 쟤가 맞는 것 같고, 얘 말을 들으먼 얘가 맞는 것 같아서 늘 헷갈렸다.
그런데 오늘은 이 토론에 갑자기 라희가 끼어들었다.
"난 사실 그것보다는 도넛이 왜 말을 안 하는지가 궁금해. 모종의 이유로 지구에 내려오지 못한다고 치자. 그래도 말은 할 수 있잖아. 왜 말을 안 하는 걸까? 자기들도 궁금할 텐데."
"말을 못하는 생명체일 수도 있지."
혜린이 지적했다.
"내가 여기서 말이라고 한 건 모든 언어적 소통을 통칭하는 거야. 글자로 쓸 수도 있잖아. 아님 무슨 소리를 낼 수도 있고. 우주선까지 만든 것 보면 분명 의사소통 수단이 있다는 건데."
"인간의 귀에 들리지 않는 음역대로 소통하는 거 아니야?"
민강이 말했다.
"그렇다면 지구상의 어떤 동물이 반응해야지. 우리가 못 듣더라도 개든 박쥐든 돌고래든 뭐든 들을 수 있는 동물이 있겠지. 근데 동물들도 가만히 있잖아."
"아니면 우리랑 소통하려고 왔다는 생각 자체가 틀린 걸수도 있어. 우리는 도넛이 궁금하지만 도넛은 우리가 궁금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이안이 말했다. 내 생각에는 꽤나 설득력 있는 가설이었다. 소통하고 싶었다면 뭐라도 했겠지. 라희 말대로 답답해서라도 5년 간 아무 말도 안 하진 않았을 거야. 언어 표본도 엄청나게 제공해줬는데 말을 못 배웠다는 건 말도 안 되지. 라디오만 한 것도 아니고 그동안 영상에 문서도 많이 보냈는데 문자라도 깨쳤을 거 아니야. 우주선을 날릴 종족이 5년 간 언어 하나를 못 배운다는 건 너무 이상하지. 말하기 싫다는 게 가장 유력해.
"네 생각은 어때, 리더기? 너만 아직 아무 가설도 말하지 않았어."
혜린의 물음에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나? 나는... 좀 웃길 수도 있긴 한데, 도넛이 많이 수줍은 건 아닌가 싶기도 해. 낯가리는 건가 싶기도 하고."
"낯을 5년이나 가리면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
이 답을 한 건 역시 라희다. 낯 가린다는 건 라희의 사전에는 없으니까.
"우리랑 다른 종족이니 문화가 어떨지는 모르는 거잖아. 알아가는 데에 시간을 많이 쏟는 문화일지도 모르고."
그럴 수도 있지, 하는 끄덕임과 함께 오늘의 토론이 끝나가는 듯 했다. 그 순간, 모두가 처음 듣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언어는 익숙한데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 이상했다. 모두가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야?"
얼떨떨한 우리의 침묵을 깬 건 이안이었다.
"방송실에서 나는 소리야."
민강은 이 말을 하고는 곧장 뛰어가버렸고, 우리 넷은 그 뒤를 쫓았다. 방송실에서 난다고?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뭐가 문제지? 우리는 방송실로 뛰어가며 서로를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방송실에 가까워질수록 소리는 점점 알아들을 만해졌다. 분명 우리가 쓰는 언어였지만, 쇳소리가 강하고 억양이 어색해서 낯설게 들렸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는데, 그건 바로 "우리는 도넛입니다. 우리는 라디오를 하는 인간과 대화하고 싶어요." 라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