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넛에게 말 걸기

3편

by 쇼쉐이

3.

도넛 안은 생각보다 아늑했다. 우주선인데도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다구가 꽤 많이 보였고, (다구가 맞다면 말이지만) 푹신해 보이는 소파가 몇 개 있었다. 우주선이라는 걸 몰랐다면 차를 좋아하는 사람의 집이라고 생각했을 법한 광경이었다. 다만 빛이 일몰일 때의 정도로 굉장히 어두운 편이었는데, 아마도 밝은 게 도넛 종족과 안 맞는 듯했다. 일단 만나면 종족 이름부터 물어봐야겠다. 도넛이라고 계속 부를 수는 없으니까.

"도넛 종족은 어두운 걸 좋아하나봐. 소파 모양으로 봐서는 우리랑 비슷한 생김새일 것 같네. 일단 다리가 있고 직립보행 생물이야.

혜린의 생물학자다운 관찰이었다. 라희가 한마디 얹었다.

"내가 보기엔 영국 사람이랑 비슷하게 생겼을 것 같아. 저 다구 수 좀 봐."

그 말에 나는 풋, 하고 터지고 말았다. 혜린도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셋이 깔깔 웃는 순간 우리 앞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도넛 종족 셋이었다.

도넛 종족은 키가 많이 컸다. 다들 2m는 넘는 게 확실했다. 어쩐지 소파 높이가 엄청 높더라니. 키가 큰 거 빼고는 생긴 건 우리랑 비슷했다. 인간을 위아래로 잡아 늘리면 탄생할 모습이었다. 길쭉하고 가늘지만 탄탄한 체형에 약간 희멀건한 눈을 갖고 있었다. 아무래도 눈이 엄청 좋은 종족은 아닌 것 같았다. 옆을 흘끗 보니 라희와 혜린도 열심히 도넛 종족을 관찰하는 중이었다. 우리 앞에 선 도넛 종족들은 우리의 시선이 낯선지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멋쩍은 정적이 몇 분 간 이어졌다. 정적이 길어진다 싶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아현이라고 해요. 라디오 하던 인간이요. 옆에는 제가 데려온다던 동료들, 라희랑 혜린이에요. 대화를 하려고 왔는데요."

도넛 종족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적거렸다. 마침내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셋 중 키가 가장 크고 허리까지 오는 밝은 금빛의 머리카락과 어두운 피부색의 조화가 인상적이었다. 담대해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말하는 건 굉장히 수줍었다.

"어... 반가워요. 저 근데 대화는 아현하고만 해도 될까요? 나머지 두 분은 우주선을 구경하시고요. 그게... 저희가... 낯선 이들을 만나는 일이 흔치 않아서 한 번에 세 명은 조금 부담스러워요."

내 가설이 진짜였다고? 낯을 가리는 거였어? 가설이 맞아서 기분이 좋은데 조금 어이가 없기도 했다. 낯을 가리는 외계인 때문에 5년 동안 이 난리를 피웠다니. 괜히 허무했다. 그래도 뭔가가 더 있는 걸지도 모르니까 대화는 해봐야지.

"아 그렇군요. 잠시만요. 라희, 혜린, 괜찮겠어?"

"뭐 어쩔 수 없지. 대화야 좀더 친해지고 해도 될 테니 일단은 네가 물꼬를 터놓는 게 나을 것 같아. 처음부터 밀어붙이면 결과만 더 안 좋을지도 모르니까."

혜린이 말했고 라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일단 나만 갈게."

나는 도넛 종족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가 당신들과 대화할 동안 동료들이 있을 곳을 안내해주시겠어요?"

도넛 종족들은 빠르게 대화를 하더니 셋 중 키가 작고 푸른 빛이 도는 피부와 흰 머리칼을 가진 도넛 종족이 자길 따라오라며 둘을 데리고 갔다. 언뜻언뜻 들리는 소리가 노랫소리처럼 예뻤다. 대화를 노래로 하는 건가? 남은 도넛 종족 둘과 나는 서로를 빤히 쳐다봤다. 내가 물었다.

"음, 우리는 여기서 이야기할까요?"

도넛 종족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금빛 머리칼을 가진 도넛 종족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불그스름한 피부에 비슷한 빛깔의 머리를 가진 도넛 종족은 나를 소파로 이끌었다. 반쯤 기어 올라가다시피해서 마침내 나는 소파에 앉을 수 있었다. 내 앞에 차를 놓기에 집어 들기는 했지만, 헬멧 때문에 먹을 수는 없었다.

"차 고마워요. 근데 헬멧을 벗으면 안 돼서 먹을 수가 없어요. 우리랑 당신들이랑 호흡하는 공기가 같은지 알 수가 없어서요. 뭘로 만들었는지 궁금한데 물어봐도 돼요?"

금발의 도넛 종족이 쭈뼛거리다 대답했다. "그럼요. 우리는 손님이 오면 꼭 이 차를 대접해요. 우리 행성에 흔한 식물인데, 몰뤼 꽃이라고 불러요. 향이 좋고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효과가 있어요. 손님을 환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요."

"우리도 손님이 오면 환영의 의미로 먹을 걸 꼭 대접해요. 그래야 정이 있다고 하거든요."

도넛 종족들은 말없이 차를 홀짝였다. 나도 낯 많이 가리지만 이들은 더하네. 이 상황에서 나도 말을 안 하면 아무도 말을 안 할 것 같아 일단 이름을 물어봤다. 그 다음은 어찌어찌 이어지겠지.

"당신들은 이름이 뭔가요?"

도넛 종족들은 답을 해주었지만, 내가 말로 옮길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었다. 마치 노래를 하는 것 같았다. 금발 도넛의 목소리는 새가 지저귀는 것 같았고, 붉은 머리칼 도넛의 목소리는 파이프 오르간처럼 장중했다. 저들의 언어는 음으로 이루어진 걸까? 자기들을 보는 내 표정이 어리둥절해보였는지, 도넛 종족들은 다시 우리 말로 이야기해주었다.

"우리 이름을 당신들이 따라하기에는 어려울 거예요. 뜻을 풀이해주자면 내 이름은 '짙은 녹음 속에서 지저귀는 새'이고, 내 친구의 이름은 '웅장한 공간의 메아리'예요. 우리의 이름은 우리의 목소리를 묘사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래서 아마 당신이 따라 하긴 힘들 거예요. 당신들의 말로 풀어서 부르면 돼요."

"당신들의 언어는 정말로 아름답네요. 당신들은 자신들을 무엇이라 부르나요? 우리는 우리를 인간이라 부르고, 우리가 사는 곳은 지구라고 불러요."

"우리는 우리를 '노래하는 이들'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세계'라고 하고요. 우리 말로 하면 이런 소리가 나죠."

'짙은 녹음 속에서 지저귀는 새'가 들려준 이름은 그 어떤 소리보다도 아름다웠다. 청아하고 깊이가 있었다. 반면 자신들이 사는 곳을 칭하는 단어는 묵직한 소리가 났다.

"아름다운 이름이네요."

'노래하는 이들'은 긴장이 조금 풀린 것 같았고,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음, 우리와 만나는 결심을 하기까지 오랜 기간이 걸린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오래 걸렸다고요?" '웅장한 공간의 메아리'가 말했다.

"네. 결심을 하기까지 5년이나 걸렸는걸요. 우리에겐 굉장히 긴 시간이에요. 우린 오래 살아야 100년을 사는데, 20분의 1이나 되는 시간이니까요."

'노래하는 이들'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이윽고 '웅장한 공간의 메아리'가 입을 열었다.

"우리에겐 길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당신들의 시간보다 늦게 흐르나보군요. 우리는 여기 와서 사태를 파악하고 다음 단계를 계획할 정도의 시간만이 흘렀습니다. 당신들의 시간을 기준으로 하자면, 몇 달 정도가 지난 셈이겠네요."

"그렇게나 차이가 많이 난다고요?" 나는 놀라서 불쑥 내뱉었다.

"우리도 놀랍습니다. 사실 우리 문화에서 소개를 해주는 이도 없이 처음으로 만나는 자와 몇 달만에 말을 트는 건 굉장히 이례적입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서로 알아가는 데에 많은 시간을 쏟거든요. 알아가고자 하는 관계에서는 목소리를 많이 나누고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눈보다 귀가 발달해서 청각적 감각을 중시하거든요. 그리고 당신은 우리에게 목소리를 통해 접촉해왔고요. 이례적이지만 말을 트기에는 적합하다고 판단했고, 당신의 목소리가 신뢰감을 주는 음이라 괜찮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당장 사태를 알아내는 게 급해서 우리 기준에서는 굉장히 빠르게 접촉을 시도한 겁니다."

이게 빠르게 한 거였다니. 좀만 느렸다가는 우리 다 늙어죽을 뻔했다. 어쨌든 의문 하나는 풀렸으니 이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 차례였다.

"지구에 온 이유가 뭐죠? 우리와 교류를 하려는 건가요? 아님 다른 이유가 있어요?"

"우리는 지구에 오려던 게 아니었어요. 사실, 지구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어요. 지구가 있는 은하를 가로질러 갈 생각이었는데, 중간에 사고가 나서 연료가 떨어지는 바람에 불시착한 겁니다."

'짙은 녹음 속에서 지저귀는 새가 말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다른 행성으로 가려다가 여기 불시착한 거고 당신들 입장에서는 사태 파악을 마치자마자 가장 가깝다고 생각되는 제게 연락을 취한 거군요? 그런데 우리 말은 어떻게 빨리 배운 거예요? 그리고 저와만 대화하겠다고 한 이유는요? 가장 친숙해서인가요?"

5년 동안 궁금했던 게 너무 많지만, 당장 궁금한 것만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이 부끄럼 많은 존재들을 다그쳤다간 일을 그르칠 것 같으니까.

"당신의 목소리가 가장 익숙한 것도 있지만, 당신은 아주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거든요. 우리가 최고로 치는 소리 중 하나예요. 맑고 단단하고 차분한 소리. 우리 식으로 이름 붙인다면 '어두운 새벽을 가르는 여명'이라 불렀을 거예요. 밝고 명확한 소리를 가졌거든요. 그래서 관습보다 빨리 안면을 터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어요. 말을 빠르게 배운 건 라디로 덕이었어요. 당신의 라디오를 녹음해두고 컴퓨터에 학습시켜서 말을 배웠거든요. 당신들의 세계는 정말 놀랍더군요. 그런 이야기들을 짓고 물체로 만들어내다니. 우리에겐 '책'이란 개념이 없어서 신기했어요. 다들 라디오를 손꼽아 기다렸어요. 그런데 당신이 마지막 라디오에서 이게 마지막이 될 거라고 하더군요. 그러고는 우리가 오길 기다린다며 라디오의 끝을 맺었고요. 가장 친숙하다고 생각한 외계인인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 말을 걸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만약 그 말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짙은 녹음 속에서 지저귀는 새'의 말은 그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어쨌든 라디오가 도움이 된 거였고, 그 과정에서 나는 두 종족을 잇는 다리가 되어 버렸다. 친선대사가 된 셈인 거다. 맡게 된 이유는 좀 이상하지만 이왕 맡은 거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겠지. 나는 심호흡을 했다.

"우리와 대화할 결심을 해줘서 고마워요. 당신들만 괜찮다면, 우리가 있는 곳으로 초대할까 하는데요. 책도 보여주고 우리가 사는 곳도 보여줄까 해요. 제 동료도 2명이 더 있는데 만나보면 좋을 것 같고요. 괜찮을까요?"

'노래하는 이들'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지만, 둘은 대화를 나누더니 좋다고 대답했다.

"좋아요. 그럼 내일 만날까요? 아, 내일이라고 하면 안 되겠구나. 흠... 제가 하는 라디오를 기준으로 잡는 게 좋겠네요. 제가 다음번 라디오를 할 시간대에 만나는 게 어때요?"

"좋습니다. 다른 이들을 데려가도 되지요?"

"오고 싶다는 사람은 다 데려와도 돼요. 연구실이 꽤 넓거든요."

"그럼 다음에 보는 걸로 하죠. 이제 돌아가셔야 할 테니 동료분들을 불러드리겠습니다. 변동이 있다면 라디오로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웅장한 공간의 메아리'는 말을 끝내자마자 라희와 혜린을 찾으러 갔다. 둘은 꽤나 신난 표정으로 돌아왔고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정부는 우리가 알아낸 걸 당장 이야기해주길 원했지만, 우리는 다음날 오전에 도넛이 우리에게 올 것이란 말만 전하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구실로 가겠다고 요청했다. 정부는 떨떠름하게 승인했다. 못마땅해 하는 정부를 뒤로 한 채 연구실로 돌아온 우리 셋은 곧장 우릴 기다리던 둘과 합류해 머리를 맞댔다.

라희는 언어의 체계에 대한 실마리를 잡았다고 했다. 음 하나하나가 알파벳과 같은데, 이걸 어떻게 배열하느냐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체계라고 했다. 그런데 단어 하나를 만들기 위해 음을 조합했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도 단어의 뜻에 큰 영향을 미쳐서 단순히 음만 분석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음악 전문가가 있어야 연구가 수월할 것 같다며, 내일 정부에게 요청할 생각이라 말했다.

혜린은 대기 샘플을 가져왔다. 조심스레 물어보니 정중하게 허락을 해주어서 가져올 수 있었다고 했다. 이걸 분석한 결과, 우리와 크게 대기 구성이 다르지는 않아 도넛에게 우주복이 있으면 가져오라고 이르기는 하되 오면 벗어보라고 해도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생김새를 스케치해도 되냐고 했더니 수줍어하면서도 꽤나 흔쾌히 응해주었다며 그림도 여러 장 그려왔다.

나는 그들과 나눈 대화를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앞으로는 도넛 대신 '노래하는 이들'이라 부르면 될 거라고 일러주었고, 눈으로 보는 것보다는 귀로 듣는 걸 중시하니 대화할 때 목소리를 크고 명확하게 하는 게 좋을 거라 말했다. 그리고 이들이 낯을 좀 많이 가린다는 내 가설이 맞았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다들 내 이야기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만도 하지. 낯 가리는 외계인이라니 나도 당황스럽다. 물론 외계인이라고 다 공격적인 건 아니겠지만, 이렇게나 낯을 가릴 거라곤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낯 가리는 외계인의 충격을 가장 먼저 극복한 건 민강이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전개네. 어쨌든 내일 온다는 거지? 그럼 오늘은 이만 정리하고 내일 일찍 와서 준비하자. 오늘 모아온 정보는 정리했으니까 내일 정부에 넘기면 되고, '노래하는 이들'이 책을 보고 싶다고 했으니까 책은 상자에서 다시 빼야겠네. 먹을 것도 좀 준비해두고. 더 해야 할 거 있어?"

우린 모두 고개를 저었다. "그럼 집에 가자." 민강이 말했다.

긴장이 순식간에 풀려서일까, 집에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집으로 가며 나는 연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도넛은 하늘에 있었고, 전과 똑같은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어딘가 달라보였다. 더 가깝고 익숙해보였다. 그동안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니 친밀감이 더 커진 것 같기도 하고. '노래하는 이들'은 우리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궁금해하며 나는 머리 위의 도넛과 함께 집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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