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소장의 'F&B 탐구생활'
그로서란트란 식사와 장보기가 동시에 가능한 신개념 트렌드로 외국에서는 식료품점을 뜻하는 그로서리(grocery)와 레스토랑(restaurant)을 합친 뜻입니다. 한마디로 식료품점과 음식점이 결합된 형태의 새로운 공간입니다. 그로서란트와 비슷한 의미로 슈퍼란트(Superant)와 레스트마켓(Restmarket)으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최근 산업 간 경계가 무너지는 급격한 '빅블러(Big Blur)' 현상이 F&B 분야에서도 생겨나고 있는데요, 유통산업과 외식산업 사이에서 공간의 혁신으로 불리우는 그로서란트가 그 사례입니다.
그로서란트의 진원지는 유럽입니다. 식당에 드나들던 손님들이 그 맛에 반해 음식에 쓰는 식재료를 궁금해하자 음식점에서 하나둘씩 재료를 팔기 시작한 것이 유래입니다. *대표적으로 스웨덴 스톡홀름의 어번 델리, 영국 런던의 데일스포드 오가닉, 미국 뉴욕의 일 부코 엘리멘터리 앤 비네리아 등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로서란트 마켓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네이버 시사상식사전)
2007년도에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탄생한 이탈리(Eataly) 브랜드는 전 세계 35개 도시에 출점하여 가장 성공적인 글로벌 체인 그로서란트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탈리는 식료품의 판매보다 레스토랑의 비율이 훨씬 높은 매장입니다. 매장과 레스토랑의 물리적 경계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며, 와인을 판매하는 옆에 간단한 안주와 술한잔 할 공간이 있고 정육점 근처에서 고기를 굽기도 하는 식입니다. 프리미엄 이탈리아 커피 ‘LAVAZZA’와 젤라토 전문점 ‘IL GELATO’, 등도 함께 입점되어 있습니다. 매장에서는 다양한 쿠킹클래스까지 열어 큰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Eataly Tours 안내 브로슈어
이탈리는 2017년 일본에도 점포 2개를 진출하였으며, 한국에는 현대백화점 판교점에 소규모로 진출하였습니다.
브런치 매거진 '외식공간 읽기'에 게재된 이탈리.
https://brunch.co.kr/@moonnight11/31
외식과 마켓의 콜라보는 사실 예전부터 우리나라에도 있었습니다. 가게에서 라면도 팔고 소주와 맥주도 파는 전주의 명소 가맥집들을 비롯하여 우리가 평소 편의점 테이블에서 도시락과 컵라면을 먹거나 마치 식당처럼 편의점 테이블에 올려진 냅킨은 상징적으로 식료품점과 식당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최근 '그로서란트'라는 명칭으로 외식업과 유통업의 경계 사이가 새롭게 정의되는 데는 급변하는 소비방식, 온라인의 급성장으로 기존 오프라인의 존재감 상실, 단지 음식과 식료품을 소비하는 것을 넘어선 더 나은 가치의 요구 등이 생겨났기 때문으로 풀이됩니다.
'그로서란트'는 기본적으로 가상이 아닌 오프라인 기반의 현실 공간입니다. 모니터 너머의 가상공간인 온라인이 줄 수 없는 '실체'로서의 공간은 앞으로도 계속 유효할 것이지만, 더 가치 있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그로서란트와 같은 멀티형, 체험형 공간의 확장이 더 가속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외식문화가 발달되어 있고 수산 식문화가 널리 확산된 대만에서는 수산물 그로서란트 마켓이 활발히 성업 중입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타이베이의 '상인수산'은 노량진 수산시장과 마트가 결합한 느낌의 그로서란트로 타이베이 농산물시장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입구에서 활어/선어/냉동 등 다양한 수산물을 고르면 매장 안쪽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조리하여 테이블에서 먹거나 Togo 할 수 있습니다. 매장 내부에는 각 동선별로 신선한 농수축산물과 가공식품을 쇼핑하거나, 스시&델리코너 등에서 원하는 음식을 주문하여 먹을 수 있습니다. 수산물은 물론, 다양한 육류조리 제품과 손질된 농산물도 취급합니다. 전체 면적 중 상품진열공간과 조리(외식) 공간 비율이 5 : 5 정도이며, 음식을 먹는 공간은 매장 출구와 건물 좌측 테라스에 총 10여 개의 테이블을 구비하고 있습니다.
수산물을 선택하고 조리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우리의 수산시장 회센터와 다를 바 없겠지만, 상인수산의 경쟁력은 수산물 유통의 강점과 외식업 운영 노하우(셰프의 역량), 마켓상품 소싱 역량이 결합된 이상적인 씨푸드 그로서란트 모델이란 점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유투브 '구재희의 지구여행자'에 소개된 상인수산
https://www.youtube.com/watch?v=mAxzJeZOa4Y&t=7s
네이버 블로그 '동in동out'에 게재된 '상인수산' 탐방기
https://blog.naver.com/airkorea9/220722630036
PK마켓은 스타필드 매장의 그로서란트 마켓입니다. '신선한 식재료, 트렌디한 글로벌 식음코너로 고객의 오감을 사로잡을 신개념 프리미엄 푸드마켓'이라는 콘셉트로 다양한 메뉴를 경험할 수 있는 즉석 델리코너, 전문가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카페, 사시사철 싱싱한 식재료 제안 코너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스타필드의 하남/고양/위례에 3개점을 출점하였습니다. 대형 그로서란트는 유통업 노하우와 외식업 노하우의 조화로운 결합과 공간 경험의 완성도가 뒷받침되어야 하나, 아직 국내의 대기업 중 이런 수준에 도달한 곳은 없습니다. 기존 마켓보다 나은, 기존 식당보다 좋은 곳이 될 수 있어야 존재 의미가 있는 공간이 그로서란트임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요괴라면으로 자신들의 기획력을 어필했던 네오스토어의 여인호대표는 취향과 감성이 우선되는 고객 중심의 맥락을 주목했습니다. 그들은 편의점을 재정의한 '고잉메리'로 라이프스타일 융합 플랫폼을 선보이며 브랜드 소비공간의 혁신을 창조하였습니다. 오뚜기 회장님도 다녀가셨던 유명한 곳이지요. 고잉메리는 실체로서의 공간이 가진 매력을 새로운 고객가치와 연결한 그로서란트형 편의점입니다. 매장의 수익보다는 타 업체의 브랜드를 입점시키고 효과적으로 홍보하는데 더 큰 목적을 둔 곳이기도 합니다.
'쿠캣마켓'은 국내 최대 음식 커뮤니티 '오늘 뭐 먹지?'와 글로벌 레시피 동영상 채널 '쿠캣', PB전문 푸드몰 '쿠캣마켓'의 푸드컴퍼니 쿠캣이 운영하는 옴니채널 마켓입니다. 온라인 쿠켓마켓의 PB와 쿠켓상품들을 오프라인에서 구매하고 바로 먹을 수도 있는 그로서란트 콘셉트를 도입했다는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쿠캣마켓의 경쟁력은 트렌드에 민감한 2030 소비자들과 1~2인 가구를 위한 차별화되고 흥미로운 제품들을 선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트렌드 중심 매장은 젊은 층의 유동이 많은 대형 특수상권 정도에서 출점 가능한 성격의 브랜드입니다. 쿠캣마켓은 1호점 잠실 롯데백화점에 이어 코엑스몰에 2호점을 오픈했습니다.
강남의 중산층 이상을 대상으로 한 삼성동 소재 드라이에이징 부처스 마켓. 생소한 개념의 이 매장은 외국 생활을 오래 한 세명의 기업 오너가 실험적으로 만든 팝업 그로서란트입니다. 개장 초기에는 드라이에이징 고기를 주문 즉시 썰어 파는 형태에서 시작하여 현재는 고기와 함께 먹을 수 있는 와인, 음료, 장류, 조미료 등을 판매하는 것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매장 안쪽에는 원테이블 룸을 마련하여 예약제로 고기 오마카세 식당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육류는 미국산 프라임급 냉장육을 시작으로 하여 조금씩 한우, 한돈으로 드라이에이징 품목을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원테이블 레스토랑은 3개월 이상 예약이 찰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리는 핫플레이스입니다. 더포터하우스는 고급 드라이에이징의 가치와 가능성을 그로서란트로 풀어나가는 좋은 사례가 되고 있습니다.
한우수출, 수입육 수입/유통 등의 종합육류 유통회사인 (주)기본에서 운영하는 부처스 그로서란트 '고기상' 서교동의 주택가에 잘 손질된 정육 판매와 함께 원테이블 레스토랑과 Bar를 꾸며놓고 그로서란트 매장을 운영하며, 스마트스토어까지 운영하는 회사입니다. 마장동의 본앤브래드가 고가의 한우오마카세를 추구하는 곳이라면, 이곳 고기상은 한우와 질 좋은 수입육을 함께 취급하며 문턱을 내리고 대중화 한 원테이블 레스토랑이자 부처스마켓입니다. 레스토랑은 수익 보다는 (주)기본이 추구하는 고기문화를 전파하는데 목적을 두고 합리적인 가격으로 메뉴를 구성하였습니다. 젊은 CEO 답게 수출입 활동은 물론 새로운 컨셉의 운영방식을 다채롭게 시도하는 모습입니다.
영양사가 차려주는 밥상 – '영차밥'은 영양사 출신의 이영숙 대표가 운영하는 한식 뷔페와 반찬가게가 조화를 이루는 일상식 그로서란트입니다. 모든 음식은 주간단위 식단표에 의거하여 체계적인 레시피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영양사 출신답게 집밥 스타일로 만드는 50여 가지 음식을 6,000원이라는 놀라운 가격으로 제공하여 고객들을 열광시키고 있습니다.
반찬코너의 가격은 시장과 마트의 중간 정도이며, 일반적인 반찬전문점에 비해 품목의 종류는 적은 편이지만, 조리사가 아닌 영양사 시각으로 만드는 마일드한 레시피의 음식은 자주 먹는 일상식의 특성상 집밥의 느낌을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반찬+뷔페 형식의 조합은 지역 동네상권에서 반찬 쇼핑과 식사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좋은 그로서란트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단, 현장 조리의 표준화와 맛 관리가 얼마나 안정적으로 유지되는지가 중요한 성공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영차밥은 부천/중동/시흥/안산/인천에 직영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로서란트는 중대형 상권에서의 ‘외식형 그로서란트’와 소형 상권에서의 ‘일상식형 그로서란트’로 나뉘어 전개되고 있습니다.
1. 중대형 상권 (전국 300여 개. 일반/특수상권) : 요리 중심으로 발전.
- 대형 역세권&백화점&할인점 등이 속해 있는 중대형 상권에서는 대기업이 주도하는 기존 점포 리뉴얼
방식의 외식형 그로서란트와 F&B업체들의 실험적 그로서란트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 제조회사의 실험적 그로서란트도 중대형 상권에서 전개 중입니다 : 에쓰푸드(존쿡델리미트)
- 유흥문화에서도 셀프 편의주점(주류상점+간편안주) 매장이 등장하고 있으며, 저가 주점 시장을 빠르게 잠식해 나가고 있습니다 : 라면국물, 핫셰프
2. 소형 상권 (전국 1,200여 개. 일반 상권 위주) : 일상식 중심으로 발전.
- 작은 식당과 편의점, 중소형 슈퍼마켓이 속해 있는 지역중심 소형 상권은 일상식 그로서란트 프랜차이즈 매장이 확산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 HMR과 밀키트를 주 콘텐츠로 하는 반찬전문점의 진화와 즉석조리식품을 강화하는 소형 슈퍼의 진화가 경쟁하는 영역으로, 온라인과 대형매장의 그물망 사이에서 촘촘하게 지역밀착형 오프라인 마켓이 시도될 것으로 추정됩니다.
- 매일 소비되는 가정식의 특성상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식사 솔루션은 소형 상권 영역에서 확대될 것이며, 단순히 메뉴의 나열이 아닌, 더 나은 레시피와 음식 수준을 선보이는 회사가 더욱 기회를 얻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상권분석 정보가 체계적으로 수록된 도서 '한국시장의 프랜차이즈법칙'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595839
그로서란트는 음식을 소비하는 모든 방식을 커버하는 모델이라는 점에서 큰 강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로서란트 모델의 강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장보기와 식사의 동시 해소
- 온라인 쇼핑 대비 욕구의 즉시 해소
- 요리과정의 번거로움/어려움 해소
- 식당보다 저렴한 전문 요리 가격
예로부터 공간의 변화는 우리 삶의 방식 자체를 바꿔왔습니다. 새로운 그로서란트 공간에서 우리의 식문화는 단순히 맛과 가격뿐만 아니라 머물 이유가 있는 가치를 주는 공간으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로서란트는 머지않아 현대인의 일상에 깊이 스며드는 공간이 될 것으로 예측됩니다.
- 더 넉넉한 삶의 여유
요리 강박관념 해소와 요리시간 단축, 장보기와 식사를 함께 해결하여 새로운 삶의 여유 제공.
- 더 좋은 식재료, 더 건강한 음식
식당에서 제공하는 음식의 원가구조보다 더 저렴한 구조로 양질의 음식을 제공.
- 국산 식재료와 식품 소비의 증가
지역에서 자란 농산물의 소비처가 늘고 농특산물의 판로가 확대되는 효과.
- 셰프의 새로운 영역 확장에 기여
더 맛있는, 더 건강한 식사를 원하는 고객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한 역량 있는 셰프 필요.
- 간편식과 밀키트의 지역상권 확대
그로서란트 확산은 물류망을 개선하여 지역상권으로 간편식이 확산되는 데 기여.
새로운 공간의 혁신, 그로서란트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가치소비의 시대, 고객의 마음을 이끄는 공간의 탄생을 계속 주시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도움 주신 분
김혜진(교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