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Hill에서 1년간 산 후 차로 10분가량 더 걸리는 Doncaster로 이사를 하였다. 지난번 집은 방이 3개여서 우리 부부와 다 큰 아들, 그리고 딸 둘이 살기에는 비좁았었고 집도 초라했다. 이번에 대학에 들어간 큰딸이 몇 년만 있으면 결혼도 하고 분가할 텐데, 부모와 함께 있는 얼마 안 되는 시간만이라도 그녀가 좋은 집에서, 좋은 방에서 지낸 추억을 주고 싶다며 아내가 주장하는 바람에 조금 무리하여 방 3개에 서재가 있는 단독주택으로 가게 되었다.
20년 전 당시 Box Hill 집의 렌트비는 주 240불, 월간으로는 1,020불이었으나 Doncaster 집은 주 350불에 월간으로 1,750불(약 120만 원)이었다. 결코 작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이곳은 보증금이 크지 않고 석 달 치 렌트비를 예치하는 형식이며, 다달이 부동산 에이전트에 입금해 주면 되므로 현재 우리 부부가 어느 정도 각각 벌어서 충당하면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부담은 되었지만 아내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동의하기로 한 것이다.
지난 3월 20일이 계약 갱신일이어서 한 달 전에 갱신 예고 안내장과 인스펙션 날짜가 기재된 안내장이 부동산 에이전트로부터 날아왔다. (호주에서는 집주인을 직접 만날 수 없고 오직 부동산 중개인을 통해서만 모든 계약이 이루어진다.)
이 갱신 예고장이 날아오면 그대로 갱신하여 살고 싶을 경우 전화로 통보하면 되지만, 다른 곳으로 이사하고 싶다면 부동산 에이전트에 가서 정식으로 서면 통보를 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인스펙션 날짜란, 렌트 계약서 작성 시 함께 첨부되는 컨디션 리포트(condition report)와 관련이 있다. 이 리포트에는 정원 상태, 각 방의 창문 상태, 벽이나 바닥의 훼손 여부, 집 안의 청결 상태 등이 사진과 함께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세입자와 부동산 에이전트가 각각 보관한다.
따라서 입주 당시와 퇴거 시의 상태가 거의 동일해야 보증금을 온전히 돌려받을 수 있다. 만약 전구가 깨져 있거나 카펫이 지저분하거나 잔디가 너무 자라 있다면 원상 복구를 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보증금에서 차감된다. 그래서 이사를 하게 되면 기존 계약을 맺었던 부동산 에이전트가 인스펙션 날짜에 와서 집 상태를 하나하나 점검한다.
인스펙션은 매년 정기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계속 거주할 경우에는 형식적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인스펙션 날짜를 통보받고 “이사를 가게 되었으니 더 이상 계약을 갱신하지 않겠다”고 전화로 알렸음에도, 이 말이 담당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서면 통보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제때 집을 비울 수 없게 되어 한 달을 더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던 탓이다.
결국 부득이하게 한 달 치 렌트비를 더 내고 새로운 집을 찾기로 했다. 그 전부터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여기저기 집을 보러 다녔는데 차 기름값도 만만치 않았고, 인터넷을 수십 차례 뒤진 끝에 마침내 한 곳을 찾았다.
이곳에서는 집을 보려면 부동산 에이전트와 바로 약속을 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에이전트가 지정한 날짜와 시간에 여러 희망자들이 한꺼번에 모여 약 한 시간 정도 집을 둘러보게 된다.
집을 보고 오던 날, 아내는 집이 너무 깨끗하고 넓다며 꼭 되기를 희망했고 입주 신청서를 작성했다. 입주 신청서에는 가족 수, 현재 직업, 월 수입, 친구나 지인의 전화번호, 직장의 연락처 등을 상세히 기재해야 하며, 어떤 곳은 반려동물 사육을 금지하는 조건도 있다.
입주 희망자가 여러 명이다 보니 경쟁이 붙는다. 부동산 대리인은 입주 신청서를 검토하면서 직장에 전화해 직업을 확인하고, 지인에게도 연락해 얼마나 오래 거주했는지를 확인한 뒤 이상이 없으면 집주인에게 전달한다. 집주인은 세입자가 여러 명이 쉐어를 하는지, 매달 렌트비를 안정적으로 낼 수 있는지, 아이들의 수와 연령, 국적까지 하나하나 따진다. 들어가는 사람 입장에서는 기분이 썩 좋을 리 없다.
수십 차례 집을 보아온 터라 꼭 되기를 바랐지만, 입주 신청서를 보낸 지 일주일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부동산에 문의해도 “기다리라”는 말뿐이었다. 집을 비워야 할 날짜는 다가오고, 다른 집을 다시 보러 다니자니 기운도 빠진 상황에서 어느 날 참지 못하고 아내와 함께 부동산을 직접 찾아갔다.
에이전트의 말은 우리가 이미 1차에서 탈락했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선정되었는데, 그 사람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아 기다리는 중이라는 설명이었다. 왜 탈락했느냐고 묻자 에이전트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2년 동안 월 1,020불을 내던 사람들이 1,750불을 낼 수 있겠느냐고 집주인이 망설이고 있다.”
생각해 보니 우리는 정식 회사의 풀타임 직원도 아니었고, 나와 아내 모두 캐주얼 잡을 가지고 있어 수입 변동이 컸다. 호주에서는 재산의 많고 적음보다 직업의 안정성과 그동안의 거주 기록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이 강하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했다. 조금 더 큰 집으로 이사하는 일조차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싶었고, 한국에서의 생활방식에서 빨리 탈피해야한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우리는 1차에서 탈락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에이전트에게 매달 렌트비는 확실히 지불할 수 있다고 말하고 돌아왔다. 그날 허탈해하던 아내는 사실 그동안 퇴근길에 매일 그 집 앞을 한 번씩 들러 기도하고 왔으며, 꼭 되기를 바랐다고 고백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 갑자기 부동산 에이전트에게서 전화가 왔다. 렌트비를 확실히 낼 수 있는지를 다시 확인한 뒤, 처음 선정된 사람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 우리가 최종 선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아내가 얼마나 기뻐하던지 지금도 그 표정이 선하다.
호주에서 이사하기 전에는, 이사하려는 집이 얼마간 비어 있었다면 최소 일주일 전에 전기회사에 연락해 언제 입주할 예정이니 전기를 다시 연결해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우리는 당연히 전기가 들어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세입 기간이 끝나 전기가 이미 끊긴 상태였다. 그 사실을 몰라 4일 동안 저녁마다 촛불을 켜고 지내야 했다.
전화 연결도 마찬가지였다. 이사 이틀 전에 전화국에 신청했지만 부활절과 연휴가 겹쳐 연결 담당자가 바쁘다며 2주 뒤에나 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만만디 같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사람이 귀한 나라구나, 호주에서 살려면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 집을 나오기 전에는 하루를 잡아 아내와 함께 카페트 청소를 하는 사람을 불러 깨끗이 해주고, 방안 구석구석을 또 온갖 전등 등을 수건으로 딲고, 온방의 유리창을 닦아주고 찬장이나 식탁, 가스레인지등을 세제로 깨끗이 해주고 인스펙트하였는데도 몇가지 지적을 받아 다시 딲아주고 하여 겨우 통과되었다.
호주에서는 집을 구하고 나가는 일조차 원칙과 순서를 지켜야 탈이 없다는 것, 그리고 내가 원한다고 해서 갈 수 있는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