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fourL May 10. 2024

1막 나라서 가능하다.

성장 과정을 살펴보면 어릴 적 나는 해맑고 인사 잘하며 사회성 좋은 평범한 여자아이였다. 여러 부분에 있어 학습을 하면 습득이 삐른 편이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아버지의 사업 성과가 좋아서 금수저까진 아니었지만 동수저 이상으로는 살아왔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엄마는 자식을 잘 키워보고 싶다는 열정이 남달랐다. 엄청난 학구열로 인해 초등 2학년부터 지금 강남 8 학군의 스케줄로 일상을 버텨내고 있었다. 부모님 말을 잘 따르고 인내력이 좋은 나였지만 지속적으로 이겨내는 게 버거웠다. 엄마의 기대에도 미치지 못했다.


울기도 하고 속상해하면서 마음이 힘들어지니 몸이 반응하며 아프기 시작했다. 점점 지쳐가면서 엄마와의 충분한 소통을 원했다. 멘토 같은 부모를 바랐던 건 욕심이었던 걸까? 나의 성향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파악해서 학습이나 진로를 안내해 주길 바랐다. 나는 82년생이다.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이르면 초등학교 중학교 때부터 치열한 경쟁을 치렀다. 그때는 자식이 부모의 소유물이라고 많이들 생각했던 것 같다. 부모의 못다 이룬 꿈이나 간절한 희망이 자식의 꿈이 되기도 했으며 대학 진학이 인생을 크게 좌우할 만큼 중요하기도 했다. 주의 친구들도 자신의 선택보다는 부모님의 의견대로 대학 진학과 전공이 결정되었다.


엄마의 투머치한 열정을 계속 따라가기에는 벅차고 한계점이 오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또래 친구들보다는 어린 나이부터 스스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반복해 왔다. 일차원적인 행동 짜증을 내거나 투정도 부려봤지만 엄마에게 절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유일한 소통 창구로 찾은 것이 손편지였다. 가장 자신 있고 잘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방법이 매우 효과적이었고 최대의 성과를 가져왔다. 편지를 통해 감정과 고민 대학 진학이나 진로 선택에 있어서 엄마가 내 생각을 전달받은 듯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살아오면서 중요한 결심이나 선택에 있어 손 편지 방법이 나에게는 통했던 거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부모님이 바라는 선택이 아닌 내가 원하는 미대진학을 하게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미술학원을 다녔다. 처음에는 초등학교 저학년이면 한 번씩 거쳐가는 과정처럼 친구 따라다니게 되었다. 만들고 그리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배우고 기분 전환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시절 그 공간에서 가장 많은 칭찬을 받은듯하다. 그렇게 연차가 쌓여 갈수록 미술은 나에게 자신감과 흥미를 넘어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대학 진학 선택에 있어 전공을 결정짓기도 했고 꿈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선택한 미술이 나에게 계속해서 좋은 성과나 기쁨 행복만을 주진 않았다. 몇 번의 좌절도 있었고 선택에 후회도 있었다.


정서적인 부분은 나를 채워주었지만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힘듦이 많았다. 대학원을 진학하면서 서울에서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동수저 이상인 부모님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혼자 독립을 하면서 경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돈이 필요한 부분이 많아졌다. 미술강사로 한 달 기준 파트타임 레슨비는 30~40만 원이었고 가장 많이 받은 급여는 130만 원에서 3.3%를 제외한 백이십오만칠천백 원이다. 그랬기에 수입이 좀 더 안정적이면서 전문적인 일들에 관해 찾아보기 시작했다. 전공과 연계성도 있고 나의 강점을 살리면서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라는 고민이 시작되었다.


자신에 관해 비교 분석하고 깊은 고민 후 쇼호스트에 도전해 보자는 결론이 나왔다. 주변 지인들과의 대화에서도 반응이 뜨거웠다. 다들 "너랑 아주 딱이다"라는 말들이 많았다. 쇼호스트를 도전하게 된 건 대학생 때 VJ를 해본 경험과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울렁증이 없고 즐거웠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실행하는 행동파다. 엄마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쇼호스트 아카데미를 등록했다. 양성반부터 시작하면서 공채 준비를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수업 시간마다 강사님들께 칭찬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칭찬 만으로는 나를 꽉 채울 수 없었다.  시간이 날수록 계속이어가야 하나라는 고민에 빠졌고 오히려 자신감은 조금씩 떨어졌다.


나는 키작녀이다. 체형이나 비율에서는 걱정이 없었다. 매번 카메라에 보이는 모습에서 사람들과 의식적으로 나를 비교하게 되었다. 다른 부분은 괜찮았는데 얼굴 중 특히 코가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강사님으로부터 코를 성형하면 더 좋지 않겠냐라는 말도 들었다. 관상학적으로 보면 재물운이 좋다는 복코다. 복코의 장점을 살리면서 다른 부분을 보완해 더욱 매력적으로 수술을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해서 공채를 한 번에 합격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나만의 강점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방송일을 하고 싶었지만 무리하게 성형까지 하면서 꼭 해야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방송일에 관한 희망은 접었지만 나에게 플러스는 있었다.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퍼스널 컬러와 이미지 메이킹 수업을 알 게 되었다. 미술 강사 일을 할 때는 몰랐던 영역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전공자가 아닌 비전공자들이 잠깐 배워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나는 그 부분을 캐치했다. 또다시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것이다. 잠깐의 좌절과 상실감이 있었으나 나는 다시 시작을 꿈꾸었다. 사람들이 말한다. 외적 이미지는 차도녀라 스파게티나 양식을 즐겨 먹을 것 같다고 하지만 아니다. 정성 가득 한정식을 즐겨 먹는 진정한 한식 마니아다.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를 가장 좋아한다. 빵이나 과자를 먹어도 김치로 마무리를 하는 나다. 내 인생에 포기는 김장할 때 배추 셀 때나 쓰는 단어다. 그때의 나는 29살 겨울 30대를 앞두고 있었다.

앙리 마티스 book

1905년 모자를 쓴 여인

나만의 감성 가득 드로잉으로 표현해 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