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죽여본 적 있잖아요?

여름에도 긴 팔을 입는 당신에게.

by 드라마티칸

누구나 사람을 죽여본 적 있잖아요?

비가 갑자기 쏟아져서 마음이 뒤바뀌어버리기도 하는 요즘, 나는 이런 질문을 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질문이라기보다 동의를 구하는 걸까? 날씨처럼, 세상의 어떤 일들은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오기도 하는 거라고. 때문에 내게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을 죽인 적이 있어요. 그런 고백. 그런 낭만. 그런 잔혹을 내게 허락해줄 수 있는지.


지난봄, 나에게는 무수히 많은 과거들이 찾아왔었다.

“어떻게 알고 왔어? 죽은 줄 알았는데….”

나는 무심코 문을 열어주었다가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과거의 나는 화가 많이 나 있었다. 제 집처럼 들어와 거실을 한 번 휭 둘러보더니, 사는 모양이 안 어울린다는 듯 비웃음을 날렸다. 나는 어떻게든 잘 달래서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에 차를 타오고 쿠키를 내왔다.

“있지… 나 많이 달라졌어. 앞으로 찾아오지 말았으면 좋겠어.”

과거는 단숨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내가 누구 땜에 그렇게 했는데? 더러운 일들은 다 나한테 시켜놓고, 너만 고상한 거 하겠다 그거야?”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과거는 나와 몸싸움을 벌이다가 장식장 모서리에 머리를 박고 죽어버렸다.

사실은 내가 장식장에 있던 크리스탈 상패로 머리를 찍어버렸다. 한 번 찍었는데 죽었다.

… 아니, 두 번. ……세 번인가? 네 번인가 잘 모르겠다.

이미 몇 번이나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시체를 처리하는 건 쉬웠다. 진짜 골치 아픈 건 과거를 죽인 내가 또 다른 과거가 되어 나를 찾아온다는 것이다.

“내가 누구 땜에 그랬는데?”

정말 지겨워 죽겠다. 살인에 지친 나는 어느 날 과거와 진짜 ‘차만’ 마셨다. 과거는 생각보다 그렇게 흉측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널 지키고 싶었어. 난 그때 너만 다치지 않을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어.”

과거가 말했다. 천박하고, 경솔하고, 가증스러운 나의 과거가 말했다.


“그래…. 수고했어. 최선을 다했어.”

나는 그날 이후로 다시는 과거를 죽이지 않았다.


사람을 죽였다고 허풍이나 떠는 나와는 다르게, 진짜 사람을 죽였던 남자도 여기 있다. 나는 찌는 듯한 여름이면 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 속 영수를 떠올리곤 한다. 그는 아무리 더워도 반드시 긴 팔만 입는다. 땡볕에서도 태연하게 긴팔을 입고 있는 그를 보면 “덥지 않으세요?”라는 질문조차 건네기 어렵다. 사실 그에게는 딱히 질문할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성공한 벤처사업가에, 누구나 호감을 가질 법한 훈훈한 얼굴(이선균), 깍듯한 행동까지. 이 도시에 가장 부합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 그가 은수라는 여자를 만나고 처음으로 반팔을 입는다. 그건 우산을 함께 쓰고 난 뒤였다.


은수 : 우산 안 가지고 오셨죠?

영수 : 아…아, 예….

은수 : 그럼 차까지… (같이 갈까요?)


두 사람은 혼자 쓰기도 비좁은 접이식 우산을 함께 쓰고 주차장까지 걸어간다. 영수는 어깨 한쪽이 다 젖는다. 그런데도 은수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 차를 버려두고 홀로 우산을 쓰며 걷는 은수에게 달려간다. 같이 걷자고 한다. 함께 우산을 쓰기 위해선 둘 다 조금씩 젖어야 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를 적시며 아무 말 없이 빗길을 걷는다.

은수의 빨간 우산을 쓰고 집에 돌아온 그는, 가방 속에서 슬그머니 자신의 까만 우산을 꺼낸다. 그가 은수에게 한 첫 번째 거짓말이다.



영수는 은수와 연인이 된다. 이제 비밀을 말해야 할 때가 온다. 영수는 사실 영수가 아니라는 것. 태경은 청소년 시절, 친구를 죽였다. 이제는 이유조차 기억나지 않는 싸움이다. 태경은 승부욕이 강한 아이였고, 그저 이기고 싶다는 자존심에 주먹을 마구 휘둘렀다. 스무 살을 감옥 안에서 맞는다. 출소 이후에도 감옥에서 벗어 나오지 못한다.


영수 : 살아야 하는 걸까? 나는 죽어야만 하는 걸까? 아무도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어요.

그때 그 형을 만났어요. 김영수. 형은 말했어요. 너에게 나를 주겠다고. 나를 가지고 살라고. 마음이 괴롭거든 너무 행복하지 말라고. 풀처럼, 나무처럼 바람처럼 살아있으니 그냥 살라고. 그렇게 살았어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사람이 아니라, 행복도 불행도 모르는 채로.

태경은 떠돌이처럼 사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의 신분을 빌려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태경은 영수가 된다. 완전한 도피였을 뿐이다. 바뀔 수 없는 과거로부터 도망친 것이다. 여름에는 반팔을 못 입고, 술은 입에도 안 대는 채 살아가는 영수. 그리고 어느 날 은수를 만나고, 더 이상 도망칠 수 없게 된다.

영수 : 어? 거기 나도 좋아하는 데다. 읽어주세요.

은수 : 네?

영수 : 아이 거기, 읽어주세요.

은수 : 그들은 어딘지는 몰라도, 어떻든, 어디에든지 있어, 말이 없고 잊어 버려져 있지만, 몹시도 충실하게 있는 것이다.



영수는 자신도 좋아하는 책을 읽고 있는 은수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대목을 읽어달라고 조른다. 아마도, 영수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사람의 입으로 무척이나 듣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어떤 후회와 어떤 죄책감과 어떤 속죄로도 바꿀 수 없는 과거에게 ‘몹시도 충실히’ 있으라고 하는 것. 거기에 태경으로, 오늘은 영수로, 몹시도 충실하게 살아가라고 하는 것. 그게 모든 살아있는 생명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 아닐까.

사랑한다. 사랑해. 그럼에도 널 사랑해. 언젠가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내가 아닌, 그 누군가에게도.



오늘의 드라마 : SBS 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 (2008년) / 원작 : 정이현 작가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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