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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향기 Jun 04. 2024

업무적 관계

부부 사이도

 부부란 나란히 앉아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사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막상 부부가 되면 앉아 있을 시간은 별로 없다. 마음도 몸도 앉아서 쉴 때 함께 있는 모습은 잘 없다. 만나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얼굴을 맞닥뜨리면, 그게 밥을 먹는 식탁이라 할지라도 업무가 생각나고 그러면 업무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이때를 놓치면 또 일부러 찾아가서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 말이다. 무엇이든 담당자를 만났을 때, 해결하고 싶지 않나. 물론 때로는 그게 실례가 될 때도 있다. 그가 식사에만 집중하고 싶어 할 때, 또는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고 싶어 할 때, 그런 때는 분명 방해가 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모두 다 알고 있다. 이때를 놓치면 당신이나 나나 더 피곤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얼굴 보았을 때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안 그랬다가 까먹고 놓치면 양쪽 다 손해라는 것을. 그래서 미안함을 무릅쓰고 업무 이야기를 꺼낸다.  


 부부도 그렇다. 얼굴 마주 보고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에도 꾸역꾸역 생각을 해 낸다. 당신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더라.. 첫째에 대한 걱정, 둘째에 대한 현황 보고, 셋째에 대한 걱정, 넷째에 관한 에피소드들. 넷째에 관한 것은 업무가 아니지 않냐고? 아니다. 넷째에 관한 즐겁고 귀여운 이야기들을 들려주어야 남편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질 것이고, 앞에 늘어놓았던 걱정거리들이 주는 스트레스가 조금은 완화가 될 테니까. 그런 효과를 위해 반드시 마지막에는 막내 이야기로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어느새 우리 부부는 서로의 역할에만 충실한 관계가 되어 버렸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의 영혼은 지금 어떤 색깔인지 궁금할 틈이 없다. 그냥 일 처리해 나가기 바쁘다. 


 이 바쁜 현대사회에서 살아남기란 그런 것이다. 바쁘게 돌아가는 톱니바퀴 속에서 나도 함께 속도를 맞추어 열심히 발을 굴리는 것. 낙오되거나 파산하면 안 된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내가 바쁜데, 옆에 있는 사람이 어떤지 쳐다볼 겨를이 있겠나. 다람쥐통은 굴러가야만 한다. 조금이라도 속도가 느려지거나 멈출 듯하면 누군가 나에게 소리를 지를지도 모른다. 어서 움직이라고. 


 요즘 마음 수양을 위해서인지 서예를 공부하고 있는 남편은 뒷모습이 무척 아름다워졌다. 일과 사람에 스트레스받지 않고, 오직 서예를 더 잘하기 위한 일에만 스트레스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남편의 뒷모습을 한 번씩 보면 세상이 멈춘 듯해 보인다. 그는 다람쥐통에서 잠시 내려와 쉬고 있는 걸까. 내가 보기엔 그래 보이지만, 막상 그에게 물어보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쉬는 게 쉬는 게 아니라고 할 것이다. 일은 쉬고 있지만, 아침마다 아이들 등교에 집안일에, 진로에 대한 걱정에 돈 걱정에 마음 편할 틈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서예를 공부할 수 있는 틈이 있지 않은가. 그는 인정해야만 한다. 그에게 서예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시간이 있었음을. 또 요즘 새롭게 시트지 붙이는 거에 재미를 붙여서 오래된 나무 책상에 온통 대리석 무늬의 시트지를 붙여 놓았다. 아주 깔끔해져서 마음에 들었다. 몇 달 동안 침체되어 있더니, 이제 슬슬 뭔가가 하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그를 믿기로 했다. 몇 달 동안 걱정하고 불안해했었는데, 어느새 자기 삶을 꾸려 가고 있는 걸 보니, 걱정했던 게 언제였나 싶다. 그는 태양인이고 나는 소음인. 그는 비전을 바라보는 리더형이고, 나는 리더가 되고 싶어 하는 천상 보좌관이다. 참모라고나 할까. 이제 그만 나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를 리더로 인정하자. 그에게만 직관적으로 보이는 비전이 이루어지도록, 나는 그를 돕는 사람이 되자. 그 속에서 나 하고 싶은 거 취미로 하면 되지. 사람마다 다 역할이 다르겠지만, 지금 나에게는 이게 맞는 듯하다. 또 언제 생각이 바뀔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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