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어인 듯 반어 아닌..
오늘은 좋은 날이다. 참 좋은 날. 왜냐하면, 내가 이렇게 숨을 쉬고 살아서 짜증과 피로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학급을 나오는데, 순간 짜증이 확 올라왔다. 아, 짜증나.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 짜증도 감사한 거야.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 이것도 감사하다. 이건 감정을 억누르는 억압일까? 아닌 것 같다. 짜증이 났다가, 아 그래 이것도 감사한 거야, 생각하니 내 마음 아래쪽 어딘가에서 마치 샘물이 퐁퐁 솟듯이 상쾌함이 솟아났다.
살아 있음. 감정을 느낌. 즐거움, 기쁨, 지루함, 슬픔, 외로움, 분노, 짜증. 이 모든 감정들은 내가 살아 있음의 증거들이다. 시험 문제를 출제하며 겪는 고통도, 낸 문제를 다시 검토하고 또 검토하고 수정해가며 제출해서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이 거대한(? 나에게는^^) 작업이 나에게 주는 괴로움도 다 내가 살아 있음의 증거이다.
그래서 감사하다. 집에서 막내는 아프다고 학교도 가지 않고, 애들 아빠는 막내를 데리고 병원이 아니라 칙과에 가봐야겠다고 연락이 오고, 나는 막내의 담임 선생님께 문자로 이 상황을 알려드리고 하는 이 일련의 과정이 너무 피곤하고 복잡하고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일들인데, 그것도 돌아서서 생각해 보니, 감사하다.
한 때는 다른 사람을 보며 인생을 참 쉽고 편안하게 사는 저런 사람도 있는데, 하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참 부러워하고,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걸까 하며 내 인생이 서글퍼 보였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얼마전 중학생 두 딸이 시험을 치는 날, 둘 다 한 과목은 백 점을 맞았다고 카톡으로 연락이 오는데, 그 순간에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 고생을 하며 사는 게 헛되지는 않았구나. 기분좋은 선물을 받은 것 같은, 그래서 참 행복했다. 그 순간에는.
그리고 나서 퇴근길에 하와이 대저택 유튜브를 들었는데, 거기에 그런 말이 나왔다. 인생에서 의미 있는 순간은 전부가 아니어도 된다고. 아주 일부만 의미 있어도 그 인생 전체가 의미 있는 인생이 된다고 했다. 도인들은 찰나의 깨달음을 얻기 위해 오랜 시간 수련과 고행을 한다. 시험에 합격하고 그 뒤에 더 행복해질 것을 기대하며 오랜 시간 수험생 생활을 하지만, 사실 가장 의미있고 행복한 순간은 시헙에 합격한 그 순간일 것이다. 합격하고 나서부터는 또 새로운 시련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러면 내가 언제 행복했었냐는 듯이 또 평범한 일상이 계속된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도, 별 일 없는 이 하루와, 짜증나고 피로한 이 순간도, 내가 살아 있음을 마음 가득히 느끼는 순간에는 변신을 한다. 빛나고 아름다운 장면으로. 그냥 내가 그렇게 느끼자면 그렇게 된다. 상황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고, 여러 가지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만, 이렇게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도 참 소중하고 좋다.
그래서 오늘은 좋은 날이다. 참 좋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