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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향기 May 19. 2024

<에이트>를 읽고

인공지능의 위협

 이지성 작가의 <에이트>를 읽었다. 칼 비테의 자녀양육서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도전을 받았다. 알고 보니 이지성 작가가 칼 비테 예찬론자였다.


 <에이트>는 인공지능의 시대가 오면 사라지는 직업들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공지능의 주도 아래 살게 되는데, 그중 소수의 사람만이 인공지능의 종이 아니라 인공지능을 다스리는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니까 준비를 지금부터 해야 한다고. 그 시대가 오는 걸 이제 막을 수는 없다고. 경각심을 일깨우는 책이었다. 작가의 심장이 막 튀어나올 것 같은 진심이 느껴졌다.


 10년 전 이지성 작가의 <리딩으로 리드하라> 책을 읽고서도 비슷한 반응이 나타났었다. 인문학 서적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설득되어 고전 책을 여러 권 사서 읽기도 했었다. 그러다 또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그 영향력은 아주 오래갔다. 


 그리고 지금 또 해야 하는 일은 역시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이유가 추가되었지만, 결론은 똑같다.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것. 읽고 생각하고 쓰기. 토론까지 하면 더 좋고.


 아휴.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나도 그렇고 온 가족이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영상을 시청하고 있다. 휴대폰이 각자 주어지기 전에는 TV 채널을 고르는 데 의견이 분분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분쟁이 없다. 각자 너무 즐겁게 자기가 좋아하는 영상에 푹 빠져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와 남편은 걱정에 빠진다. 우리도 핸드폰의 즐거움을 만끽하지만, 그러면서도 아이들이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보면 왜 이렇게 걱정이 되는 걸까. 우리부터 안 해야 할 텐데, 우리조차도 그게 너무 어렵다. 모두 이미 휴대폰 중독자가 되어버린 듯하다. 


 네 아이 모두 핸드폰을 가지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막내가 초3이 된 올해 초에 핸드폰을 사주었기 때문이다. 큰 아이는 중1 때, 둘째는 초6에, 셋째는 초4에, 그리고 넷째는 초3에 자기 핸드폰을 소유했다. 전혀 좋지 않다. 좀 더 내가 버텼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기도 하지만, 후회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나.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인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억지로 방법을 짜내보면 여러 가지가 있다. 핸드폰 사용 시간을 정해서 그 시간만 사용하게 하는 것, 가족 모임 때 독서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것, 내가 먼저 책 읽는 모습을 보이는 것, 분기마다 서점에 데려가서 원하는 책을 사 주는 것 등등.


 급기야는 전기세를 아껴야 한다는 핑계를 대며 밤 12시에 와이파이 전원을 끄기도 했다. 내가 먼저 잠들어버려 곧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지만. 부모가 이렇게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아이들은 알까.


 또 이런 생각도 든다. 부모가 이렇게 저렇게 애를 써도 결국 아이들은 어떻게든 각자의 인생을 잘 꾸려 나가지 않을까. 주어진 자기 팔자대로 살지 않을까. 어떤 아이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부모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기 재능을 펼칠 수도 있고, 어떤 아이는 딱 부모가 해 준 만큼 그 안에서 자기 인생을 펼쳐가고, 그런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고민으로 방향이 바뀐다. 그래서 지금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해야겠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나 자신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나를 바꾸어보려고 하니,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또 남편이다. 남편을 왕대접하는 아내가 되어야겠다. 왕비가 되려면 그 방법뿐이더라. 그리고 나 자신을 열심히 가꾸어야겠다. 아이들더러 책 읽으라 하기보다 내가 책을 열심히 읽자. 읽고 쓰고 생각하자. 읽기 싫을 때는 쓰고, 쓰기 싫을 때는 읽고, 이도 저도 하기 싫을 때는 생각이라도 하자.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일단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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