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성실한-게으른, 다정한-자기중심적인, 섬세한-무심한, 따뜻한-냉정한, 꼼꼼한-덤벙거리는'
무척이나 상반되는 이 수많은 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라는 단 한 사람에게 덧대어진 수식어들이다. 함께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어떠한 상황이었는지에 따라 나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극과 극을 오간다. 하지만 삶의 어떤 장면에서도 한 번도 잃지 않은 타이틀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순한 사람'이라는 평판이다. 유사어로는 '평화주의자', '부드러운 사람', '착한 사람' 정도가 있겠다. 그런 내 안에, 어쩜 가장 어둡고 깊숙한 곳에, 늘 조용히 숨 쉬고 있는 괴물 하나가 있다. 그건 바로, 누군가를 지독히도 미워하는 마음이다.
이 괴물은 한 번씩 대상을 바꾸어가며 맹렬하게 공격을 퍼붓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오랜 시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표적은 바로 나의 엄마였다. 내 마음이 이토록 볼품없게 망가진 건 다 '언젠가의 엄마' 탓이라며 '과거의 미숙했던 엄마와 어린 나'를 소환해 낱낱이 파헤치고, 치열하게 원망했다. 엄마에겐 기억조차 남지 않은 어느 날, 어느 순간을 나는 몇 번이고 지금으로 생생히 끌어와 자꾸만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그렇게 덧난 상처를 움켜쥐고는 울고 또 울다, 그 아픔이 도저히 혼자 삭힐 수 없을 지경이 되면 엄마에게 가시 돋친 말들을 퍼부었다. 그러고는 당당했다. 마치 죄인의 오래 묵은 벌을, 늦게나마 마땅히 집행한 재판관이라도 된 것처럼.
목표물은 종종 새로운 인물로 바뀌었다. 대부분은 내 삶에 제각각의 이유로 등장한, 퉁명스럽거나 무례한 누군가였다. 괴물은 그들을 향해 '아니, 뭐 저런 말을 한담?' 혹은 '저 사람 왜 저래?'와 같은 가벼운 당혹감을 넘어서는, 대단한 불쾌감을 내뿜었다. 나라면 하지 않았을 말, 나라면 짓지 않았을 표정, 나라면 취하지 않았을 몸짓은 언제나 레이더망에 포착되었다. 내 인생을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인 누군가의 작은 흔적에도 신경이 곤두서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혹시 나는 인간 혐오주의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종종 의기소침해졌다.
아무리 따져봐도 지나친 감정이었다.
'나랑 별 상관도 없는 사람이잖아, 신경 쓰지 말자.'
'그 사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겠지.'
'나도 부족한 점이 있었을지 몰라.'
'지나간 일을 자꾸만 곱씹어서 뭐 해? 이제 그만하자.'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며, 나조차도 이해하기 힘든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히려 무던히 애썼다. 그런데 참말이지, 좀처럼 잘 되지 않았다. 이놈의 성격 한번 지랄 맞다.
겉으로는 '평화주의자'라느니,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살고 싶다'라느니 말하면서도,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는 마음 저 깊은 곳에선 이렇게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에 자주 휘말렸다. 괘씸하고, 몰염치하고, 나쁜 사람. 세상에는 그렇게 못마땅한 사람이 천지였다. 누구도 미워하고 싶지 않은데, 내 마음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렇게 제멋대로 날뛰는 마음에 압도당할 것 같은 날엔, 나의 선생님을 만나러 가야 한다.
한편으로는 격앙되고, 또 한편으로는 풀이 죽은 채 찾아와 잔뜩 쏟아내는 지친 마음을, 나의 선생님은 찬찬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어린 시절부터 유독 애어른처럼 굴고, 일찍 철들었다는 말을 들으며 남들 보기에 반듯하게 살아온 사람일수록, 실은 마음속에 타인에 대한 공격성을 품고 있을 수 있다고.
‘공격성이라고, 내가…?’
아… 그래. 정말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나는 ‘사람은 이러이러하게 살아야 해’라며 도덕성의 잣대를 제멋대로 높게 쌓아 올리고는, 난 이것을 지키려 이렇게나 애쓰며 사는데, 당신들은 뭔데 그렇게 제멋대로 사느냐고 속으로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만 옳고, 당신들은 다 틀렸다며.
어쩌면… 나는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이 버겁고 단단한 ‘틀’ 바깥에서 함부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그들이 실은, 얄밉도록 부러웠는지도.
언제나 그곳에 있었으나 좀처럼 친해지지 못했던 내 마음속 괴물에게, 이제야 이름을 찾아주었다. 높은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끝없이 자신을 몰아붙이다 그만 남들까지 그 틀에 맞춰 통제하려 애썼던, 내 아프고도 슬픈 짐승이다. 그릉그릉 숨죽이고 있는 네가, 무척이나 안쓰럽다.
슬그머니 옆에 앉아, 조심스레 등을 한번 쓸어본다.
이제 그만 화내도 돼.
뭐가 그렇게도 두려웠니?
다 괜찮아, 그래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