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화통이 터진다. 얼마 전에 마치 엄마와의 문제가 다 잘 해결된 양, 저어기 저 높고 가파른 산을 드디어 넘은 양, 내내 고전을 면치 못했던 일생일대의 과제를 마침내 슬기롭게 완수한 양, 감격에 겨워 콧날 시큰해가며 글을 썼더랬다. 어쩐지 전보다 좀 멋진 인간이 된 것 같다는 뿌듯함에 얼큰하게 취한 채, 이제 드디어 엄마가 밉지 않은가 보다며... 젠장, 수십 년 묵은 문제가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리가 없지.
평생 "엄마는 마음이 약하잖아!"와 "너 때문에 내가 불안이 잔뜩 일어나서 잠 한숨 못 잤다!"를 방패 겸 무기로 휘두른 엄마 앞에 '뉴비' 불안장애 환자는 만만치 않은 스탯으로 무장한 채 우뚝 선다. "엄마, 나도 불안하거든? 나도 엄마가 한 말 때문에 밤 꼴딱 샜거든?!!"을 외치며. 다른 집은 "뭐, 너 사춘기냐? 나는 갱년기다."로 싸운다는데 우리 집은 머리 하얀 할머니와 이제 아무리 깎아봐도 중년인 딸이 불안 배틀을 하며 싸운다.
불안한 사람은 객관적인 정황과 관계없이 스스로 만든 지옥불에 뛰어들기 십상인데, 그 자체로도 심각한 문제지만 워낙 마음이 괴롭고 절박한지라 앞뒤 볼 것 없이 주위 사람들을 잡아채 달달 볶기 쉽다는 또 다른 중차대한 문제가 있다. 이 모든 건 '나'가 아니라 '너' 때문이라 박박 우기며. 불안장애는, 이렇게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괴롭히기 쉬운 무지하게 슬픈 병이다.
오랜 세월 꿍꿍 앓다 지쳐 도망도 가 봤고, 옛날에 태어났으면 능히 장군이라도 했을 법한 엄마의 기세에 눌려 매번 찍소리도 못하다 마음의 병도 얻었으며, 맞서 싸울 자신은 없는데 억울하고 분하니 대신 수동 공격을 숨 쉬듯 해왔다. 엄마가 "내 마음이 힘든 건 너희들 탓이야!" 한 바로 그만큼 혹은 더 멀찍이 뒤로 물러서서 '사실은 다 엄마 탓이야'를 되뇌며, 호시탐탐 은근한 복수를 꿈꾸면서.
부지런히 병원을 다녀도 자꾸만 악화되는 시력, 눈에 뜨이게 쇠약해져 가는 몸, 흐려져가는 판단력, 서두르고 흥분하다 그르치는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 어쩜 엄마에겐, 그리하여 우리에겐 남은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여자 대 여자로서, 엄마와 딸로서 진심으로 화해할 시간이. 나는 더 이상 물러서지 않기로 했다. '불편한 내 마음'을 똑바로 바라보고 집요하게 파고 들어가 기적처럼 '작은 나'를 만날 수 있었듯이, '불편한 엄마'를 피하지 않고 마주하기로 한다. 어느 날 엄마가 나의 세상에서 사라지고 더 이상 그 무엇을 해 볼 아무런 기회도 남지 않았을 때, 맥없이 흘려보낸 '오늘'을 후회하고 싶지는 않으므로.
자꾸만 '혼자만의 세상'을 만들어 아파하는 엄마가 이제는 그만 거기서 나와 세상을, 그리고 나를 제대로 보았으면 좋겠다. 엄마가 또다시 '고통스럽지만 익숙한 무기'인 불안을 움켜쥐면, 만만치 않은 내 불안도 높이 들어 보이며 그 지긋지긋한 거 좀 치우고 살아보자고 벅벅 소리라도 쳐 볼 테다. 이제, 전쟁이다. (휴우... 엄마, 근데 살살 좀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