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나이

모든 국민은 만 살씩 더 먹었지.

by 이백지

"너무 심하게 놀지 않게 최대한 안정을 취해주셔야 합니다"
아내는 이런 이야길 들었을 것이다. 2주째 기침 감기가 개선되지 않는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에 다녀온 아내에게 의사 선생님의 1분 처방이었을 말을 아내는 잘 수행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 말이다. 아내와 난 다른 귀를 가진 사람이다. 아내는 정해진 규칙과 규율, 약속 등을 중시하는 편이고, 나는 가끔 의사의 권유를 무시한다. 내가 뭐 잘나고 나에 대해 해박한 의학적 지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시간과 여유가 없어서이다.


아빠는 아침에 아이들이 부탁했던 킥보드 타고 집에 오고싶다는 말을 기억해 3개의 킥보드를 합체 후 어린이집 앞에 주차했다.



정신과 진료를 받고 온 아내의 질타가 이어진다.
"당신, 아이들 너무 과하게 놀거나 땀 흘리면 안된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했는데 왜 그러는 거야 진짜?"
오후 반차를 내고 아이들을 어린이집에서 하원시키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놀이터에 들렀었다. 그네도 타고, 미끄럼도 타고 킥보드도 타고 잠깐 놀다온 것을 아내는 나무랐다. 나에겐 그리고 아이들에겐 아빠가 어린이집 하원을 도와주는 건 반 년에 한 번 있을 법한 일이고 특별한 날인데 그냥 집으로 들어가기엔 무언가 아쉬움이 큰 그런 날이었다. 아내는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의 5분 권유 시간에 들은 "뱃속에 쌍둥이가 있으니 최대한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소리를 들은 이후 지금까지 약 6년 여 시간 동안 계속해서 안정을 취하고 있다. 정신과 진료를 주기적으로 찾는 것도 마음의 안정이 부족해서일 것이다.


방과 후 놀이터에는 뛰어노는 아이들보다 어르신들이 더 많았다. 누군가 줄을 서면 아들은 불안을 느끼고, 딸은 불만을 느낀다. 각각 상황을 이해하는 감도가 다르다. 나와 아내처럼




나는 남편으로는 안정감이 부족한 사람이다. 아내가 의사의 권유에 집착하는 반면 나는 음식의 유통기한에 집착을 보인다. 가끔 나이 드신 분들이 권하는 음료를 별 생각없이 마시다 보면 유통기한이 1년이 지난 음료에서 염세적인 맛이 느껴진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에 민감해지지 않는 걸까? 젊은 이들이 사는 집의 냉장고는 유통기한 내에 대부분의 음식이 소진된다. 특히 아이가 있는 집은 더더욱 그렇다. 반면 어르신들만 남은 집에서는 음식의 회전율이 상대적으로 더딘 편이어서 음식이 장기보관 되는 경우가 많다. 모두가 만 살씩 추가로 먹은 상태에서 나라도 권장소비자 가격이 권장인지 강요인지를 궁금해 하는 지금 적당한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을때 먹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아내는 나와 다른 귀를 가진 동시에 나와 다른 안정감을 지녔다. 채우는 것에서 안정을 느끼나 보다. 냉장고에 가득한 그 상태, 아이들 간식이 가득한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주유소에서 "만땅이요"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와 유사하다. 어제는 보리차를 꺼내 먹으려다 우연히 3개월 지난 배추를 발견했다. 나는 냉장고를 도굴하는 사람처럼 몰래 배추를 꺼냈다. 절반은 이미 묵은지로 변해있었고 비닐 패킹 안은 살바도르 달리 형님이 다녀가신듯 보였다. 범행 현장에 다시 와보니 이번엔 9개월 지난 카레 가루가 있었다. 한 번 열면 멈출 수 없는 프링글스와 달리 카레는 한 번 맛보고 멈추었다. 뜯겨진 비닐 봉지에서 1년 전 아내가 해준 카레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아이들 플라스틱 젓가락에 배인 카레는 다시는 냉장고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썩어버린 무언가는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다. 이미 유통기한의 차원을 넘어 다른 시간의 세계로 가버린듯 보였다.

얼마 전 건강검진 결과로 심뇌혈관 나이는 실제 나이보다 4살 어리게 나왔는데 냉장고 나이는 60대쯤 되어 보인다. 이상지질혈증 의심으로 30일 이내 가까운 병/의원을 방문하여 진료를 받으라 하는데 아마 몸의 신선도가 많이 떨어지고 나서야 병원을 찾아갈 것 같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병수발은 아내에게'
남편들이 믿고있는 진리에 가까운 말이다.





결혼은 순후추 맛이다. 모두가 카라멜 버터처럼 달콤한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가혹하다. 안 먹어보면 맛을 모르고, 먹어보면 맛을 알게 된다. 인생의 쓴 맛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