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는 축복인 동시에 가혹한 형벌이다. 딸을 바라보고 있자니 손주들까지 대신 키워달라며 드러누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육'체적 한계가 찾'아'오는 그 날까지 자식을 돌봐야 한다면 축복은 형벌에 가깝다.
"그만 먹어!" 아빠의 말은 딸에게 들리지 않는다. 스프 가루를 날려 모스 부호로 don't eat 을 입력했지만 모스버거를 먹고싶어한다.
아내는 모스 부호 대신 몽둥이를 들었다. 몽둥이라는 통신 언어는 권유나 부탁의 어조보다 설득력이 있다. 아빠는 주방에 갖혀 지낸다. 아이들에겐 거실을, 아내에겐 안방을 내주고 설거지 지옥에 자진입성한다. 아내는 콘스탄틴의 키아누리브스처럼 지옥을 오가며, 기계처럼 설거지를 끝낸다. 아무 일도 하고 싶어하지 않는 아내는 일단 시작만 하면 일처리 속도가 빠르다. 나와는 다른 유형의 존재다. 20대 때 이미 주방과 홀 서빙에 만랩을 찍었지만 전업으로 시작한 주부는 8년째 Lv.1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결혼했지만 외벌이 남편은 기계가 되었고 집순이 아내는 거대한 벌레가 되었다. 아내는 이혼이라는 날개를 이상처럼 여기는 듯하다. 정작 아무런 경제적 대비나 준비없이 전 남편이 되어주길 바라는 나의 생활비로 살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기계는 재능 넘치는 벌레를 말없이 바라본다.
아내는 2회 연속 남편의 친척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다.
"아빠, 친척이 뭐야?"
딸 아이가 묻는다.
"응, 할아버지의 형이나 동생이 결혼을 해서..."
"형이랑 동생이랑 결혼했어?"
"아니, 둘이 결혼한 게 아니라 따로 따로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아빠랑 친척이 되는 거야."
내가 생각해도 너무 어려운 설명이다.
지금 돌잔치에 가는 친척도 어려운 관계다. 이모가 30년 전에 결혼을 했는데 이모부는 이미 한 번 결혼을 하신 상태에서 아이가 둘이 있었고 이모와 만나 이모가 낳지 않은 아이 둘을 키우게 되었다. 남편 + 아이 2명을 패키지로 얻고 시작한 결혼 생활에 나는 급작스럽게 새로운 사촌이 생겨버렸다. 그 아이가 지금 아이를 낳아 돌잔치를 하는 것이고, 이 아이는 3년 전 우리 아이 돌잔치 때 오지 않았다. 불편한 마음을 안고 출발했다.
이 아이에게 불편했던 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0년은 더 되었을 것이다. 세상에 예쁜 여자는 미디어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존재라 믿었던 시기, 이 아이는 나를 자신이 다니는 회사 세미나에 불렀다. 회사 선배로 보이는 분은 미디어에 나와도 될 정도의 미모를 지녔었다. 여기까지만 들어보면 그리 불편한 추억은 아니지만 이 선배를 계속 만나려면 자사 홈페이지에 가입해 일정 포인트의 자사 제품을 구입해야만 다시금 얼굴이라도 볼 수 있는 그런 자리였다. 그리고 자연스레 관계가 멀어졌다. 불편한 감정은 만나서도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3년 전 본인 입으로 남편과 결별했다는 소식을 전했었는데 이제와 결별한 남편과 결합해 아이가 생겨 돌잔치에 오라하니 당황스러운 전개가 아닐 수 없다.
아이는 엄마를 닮았다. 엄마의 어린 시절 모습이 그대로 배어있다. 한 달에 이틀을 제외한 남은 날들을 술로 자신을 흠뻑 적셨던 그 시절 이전의 순수한 모습이다. 내가 참 많이 좋아했던 그 모습이 딸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지금은 사라진 아름다운 기운이 아이에게 옮겨간 모양새다. 참석한 모든 이들이 무서우리만큼 부모를 닮아있다. 내 아이 역시 나의 단절된 우주로부터 시작된 마지막 희망이기도 하다.
나는 모르오! 닭이 울어도, 손가락을 펴보고 숫자를 순서대로 생각해 보아도 나는 모르오.
딸과의 수싸움, 시력검사
단절된 우주는 나의 정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