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의 깊이

by 이백지

아내와 아이를 재우고 술 한 잔을 들이킨다. 지난 시간을 후회해본 적은 없다. 아마 20대와 30대 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도 결과는 그리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막 돌이 지난 아들을 가진 것 역시 너무나 행복하다. 다만 삶이 벅찰 뿐이다. 우울증이 심해졌다. 삶의 무게때문인지, 부양해야 할 가족의 숫자가 늘어서인지는 구분이 모호하다. 초전도체마냥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데 나의 저항값은 매달 170만 원이다. 원금을 제외한 이자만 말이다. 매 달 아내에게 100만 원씩 생활비를 주고 있지만 아내가 그동안 직장생활 하면서 모아둔 돈을 계속 쓰고 있는 실정이다. 장사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100m 거리에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의 입점이 예고되어 있다. 혹독한 계절이 다가온다.



물의 깊이는 발을 담궈봐야 알 수 있다.





10년 후를 떠올리면 지금보다 상황이 안 좋을 가능성이 크다. 내 아버지는 아들의 원망을 들어보지도 못한채 세상을 떠나셨다. 퇴직 후 야심차게 준비했던 사업은 월세 임대료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반응이 좋지 않았다. 사업의 결과는 두 가지 항목뿐이다. 성공 또는 실패. 현상유지는 실패로 가는 더딘 발걸음일 뿐이다. 한 번쯤 아버지를 원망하는 시기가 있다. 본인이 선택하지 않은 성격이나 외모, 재산 수준때문에 말이다. 특히 아버지가 사업 실패를 겪은 집들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의 수위도 높다. 실패를 잘 이겨내는 모습 또한 아버지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거늘 아버지의 어깨는 언제나 무거워 보였다. 조별과제를 혼자 짊어진 조장처럼 말이다. 행복한만큼 책임감도 커지는 것일까? 아버지가 되어보니 내 아버지가 끌었던 수레의 무게를 실감한다. 수레바퀴 밑에서, 거인의 그늘 아래에서 편하게 생활하던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 아버지라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 바라본 세상은 항상 쉬워만 보였다. 어린 아이가 흔히 하는 착각이다. 힘이 생겼지만 뚜껑조차 열지 못하는 미약한 힘이었고, 타인을 도우며 살겠다는 다짐은 삶의 무게로 인해 자신의 생명 연장에 모든 에너지를 동원해야만 하는 비루함에 고개를 들지 못한다.




강아지는 사람보다 빨리 늙는다.






개는 말할 것도 없다. 외로움과 허전함을 달래주던 친구 녀석이 늙어가자 생각보다 병원비가 많이 들어간다. 동물병원에서 비슷한 사례를 겪은 다른 강아지의 진료차트를 살펴보니 떡밥이가 이 병원에서 쓴 돈만 1400만 원 가량이다. 실내 낚시터 사장님은 돈을 벌어 개의 뒷바라지를 하셨나 보다. 내 신세 역시 그렇다. 아내의 집안 살림 반찬들처럼 과감하게 버리지 못한 강아지 한 마리는 이번 달 100만 원 이상 치료비가 들어가고 있으며, 그로인해 나는 3일 연속 9시까지 일하고 있는 상황이다. 7시 출근, 9시 퇴근 생활을 당분간 지속할 예정이다. 그래야 강아지 치료비 카드값을 해결한다. 아마도 지금 키우는 강아지가 세상을 떠나면 더는 애완동물을 키우진 않을듯 하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두 번 할 에너지도 재력도 남아있지 않다. 둘 중 누구 하나가 세상을 떠나면 끝을 맺는 계약서가 주민센터에 보관되어 있다. 증명서에는 사망으로 기록될 나, 그리고 너는 아빠와 엄마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금이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믿고 있었는데 아이가 태어난 시기, 걷기 시작할 무렵, 엄마와 아빠라고 불러주던 시기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싶다. 무엇이든 다 해주고, 들어주고 싶던 그 시기 말이다. 책임의 깊이가 늘어갈수록 아들은 점점 나를 닮아가고 딸은 점점 엄마를 닮아간다. 그래서 딸이 가끔 무섭게 느껴진다. 잔소리 머신이 될까봐...






잔소리 머신의 마력이 차오르면 잔소리도 스테레오 타입 돌비 사운드로 즐길 수 있는 그런 압도적인 음향 시스템이 갖춰질 무렵 아버지는 보청기를 필요로 하신다. 고막의 부담을 더는

게 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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