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면 편해

by 이백지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이들의 마음 말이다. 돈과 시간이 주어지면 고민해 볼 문제지만 없는 상태에서 추가 옵션을 고민하는 것부터가 희망회로 돌리는 무의미한 상상일 뿐이다. 애초에 내가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아버지의 지원 덕이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조별과제는 막내 아들의 장가였고 며느리의 외모나 성품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듯 했다. 마치 대학만 입학하면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환상처럼 아들을 결혼시키고싶어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조별과제 마감 전 이미 여자친구가 생기셨다. 아들의 결혼 후 출가는 인생 과제의 마지막 퍼즐이었다.

퍼즐의 첫 삽은 선 자리였다. 아버지의 인맥 중 미용실 원장님의 지인 혹은 고객 중 한 분에게 혼기가 가득찬 딸이 있었다. 혼기만 가득찬건 아니었다. 지금의 아내보다 한체급 위였다. 패배를 직감했다. 라이트 미들급인 나는 스파링 상대의 사전정보없이 링 위에 올라 곧바로 수건을 던졌다. 서로 예의를 지켜 식사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식후 커피를 자판기 커피로 마시진 않았다. 상대는 나보다 연상이었고 장대했다. 제주도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난 여리여리한 연상 누나와는 지리적으로 시각적으로 거리감이 분명해 보였다.

'아빤 아들 결혼을 원하시지, 대상이 중요하진 않으신가 보다.'

결혼은 둘만 좋아서 하는 게 아니다. 명절이나 모임 때 꾸준히 만남을 지속하기때문에 모난 성격이면 곤란하다. 술과 도박, 흡연 유무 등 따져야할 것도 많다. 2세 계획이나 가치관도 살펴야하는 대목이다. 씀씀이는 또 어떠한가. 내가 350~450을 버는데 상대방은 수입이 없으면 그 돈으로 둘 또는 자녀에 양가 부모까지 모셔야 한다. 무작정 이 사람이 마음에 들어서, 나 좋다는 사람이 더 이상 국내에 존재하지 않을듯 해서 도피처럼 떠나는 결혼에 행복이 싹틀리 만무하다. 국외로 눈을 돌려도 마찬가지다. 2세에 대한 차별을 감내해야 한다. 선비의 나라여서 사람들은 국외선비를 선호하지 않는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결혼은 둘만 좋아서 하는 게 아니다. 부모의 기대와 자녀 양육의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한다. 내가 마지막까지 자녀 계획에 망설인 이유는 400을 벌어 저축도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포기하면서까지 자녀를 키울 용기와 담대함, 아빠로서 자녀에게 미래에 듣게 될 원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까?'

아이는 낳는다고 끝이 아닌 그때부터 30년 이상을 바라보는 장기 계획이다. 내가 다니는 직장은 안정적으로 20~30년 후에도 다닐 수 있는 곳인지를 물으면 섣불리 답하기 어렵다. 결국 아내는 아이를 낳는 것에만 집중했을 뿐이고 이 걸 30년 이상 유지해 나가는 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었다. 모든 아빠들은 그래서 위대하다. 책임을 다하고 있으면서도 힘든 티를 안내는 멋쟁이들 말이다.

나는 모험가가 되기로 다짐했다. 아이들에게만큼은 뱃속에 잡은 물고기를 게워서라도 생명을 자라게 하고 싶었다. 내가 굶더라도 말이다. 누군가 말한다. '사회생활은 전쟁터, 육아는 지옥'이라고, 난 지옥의 불길 속에서 찜질한다. 현관문 안에서 아이들이 반긴다. 케르베로스(지옥을 지키는 머리 셋 달린 개)의 꼬리가 보인다. 자동차란 연옥에 앉아 지옥을 향해 달려가는 모험가들이 퇴근 시간 거리에 즐비하다.


대한민국은 아이를 낳으라고 권하지 않는다. 세월호가 침몰하는 순간 국가는 더이상 아이들을 원하지 않는다고 선포했다. 설령 그것이 불의였다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 생명의 강은 한 번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시간처럼 무심하다. 가난과 결핍의 시간 또한 결이 같다. 머릿속엔 한 달 생활비가 모자라지 않게 공과금, 수도, 전기, 관리비 등을 납부하기 위해 온갖 에너지를 쏟는다. 과소비를 하지 않음에도 생활비가 모자라는 건 외벌이의 한계때문이다. 내가 아버지를 원망하는 지점이기도 하며, 미래를 어둡게 그리는 계기이기도 하다. 아버지께서는 외벌이 결혼을 망설이는 내게 자신도 그러한 길을 걸었다며, 사람은 어떻게든 다 먹고 살게 되어있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막상 살아보니 이건 아닌 거 같다는 생각에 아들의 이혼 계획 제출에도 철회할 것을 강권하셨다.


이번 주 점심은 1400원 짜리 편의점 빵이었다. 오전 7시 25분 아침 식사를 하지 못한 회사 형들과 컵라면을 끓여 먹는다. 그 날따라 배가 더 고프면 초코우유 하나를 집어든다. 이번 달 카드값이 400만 원을 넘겼다. 키우는 강아지 각막에 구멍이 뚫려서 200 이상을 쏟아부었지만 내 공복의 뱃속은 쉽게 뚫리지 않았다. 외벌이가 처참한 건 이 모든 책임의 주체가 본인의 결정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상대를 평생 책임져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난 앞으로 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으리라. 백지영이 되어 다짐한다. 꿈에 아내가 등장하지 않은지 오래다. 자꾸 무언가를 해달라고 부탁만 하는 사람은 무의식이 거절하는 모양이다. 현실에선 사소한 부탁이라도 들어주지만 반대편 무의식에서는 부탁하는 대상을 밀어낸다. 마치 치매가 오면 "누구세요?"라고 제일 먼저 물어볼 사람처럼 아내가 멀어져 간다. 술 약속이 잡혀 한 잔 거하게 말아드신 아내가 침대에 누워 물을 요구한다.

"가습기 물, 아님 그냥 물?"

손으로 컵 모양을 만들고 입을 벌려 들이키는 시늉을 해보이는 아내의 입모양이 메기를 닮아있다. 싱크대 수전에 물을 틀어 컵을 닦자 아내가 외친다.

"쏘 스윗~"

"아니, 수돗물 주려고."

서울 시민 누구나 안심하고 먹고 마시는 아리수, 가슴 한 켠이 아리고 쓰리다.

이전 10화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