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왜 안가나 몰라"
마흔 중후반을 달리는 딸이 못내 못마땅한 모양이다.
"할머니, 따님이 눈이 높아서 그런 건 아닐까요? 요새 혼자 살기 편해서 굳이 결혼해서 상대방 비위 맞추며 살지 않잖아요."
나 역시 도피 유학처럼 결혼을 선택했다. 명절에 결혼 안하냔 잔소릴 피해서 떠난 모험의 여정이었다.
"내가 언제?"
아내는 전혀 인식하고 있지 못했다.
"당신 나한테 가스라이팅 엄청 했었어."
이십대 대부분을 뉴질랜드로 도피 유학을 떠났던 아내는 영주권 획득에 실패했다. 사람과 사랑을 독점하고 싶어하는 성향은 딸의 태도로부터 유추할 수 있었다. 마음에 드는 상대를 집착에 가깝게 매달린다. "나야? 아니면 그 친구야? 누가 더 중요해?" 따위의 이분법적 설교를 신혼 초부터 들어왔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절친을 앞으로 만나지 말라고 하는 것에서부터 이상함을 느꼈다. '왜 상대방의 인간관계까지 교통정리하듯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걸까?' 나에게 충언을 아끼지 않는 친구였다. 친구가 보기에 아내는 이상하거나 혹은 수상해 보였을 것이다. 아내가 보기에 내 친구의 영향력이 자신보다 우위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내는 내가 그 친구를 만나고 오면 자신과 심리적 거리가 멀어진다고 여겼다. 가스라이팅이란 단어가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소리내어 외치듯 글을 써내려갔다. 처음 가졌던 원망의 감정도 많이 수그러졌다. 어찌보면 아내가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아내 역시 어린시절부터 장모님께 가스라이팅 당하며 자라왔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잘못과 책임은 오직 남펀에게만 해당되는 단어인가?'
신혼 초 아내는 사과를 종용했다. 자기중심적 사고관의 세계에서 타인은 늘 거슬리는 행동과 말을 하는 유해 요소나 버그로 여기는듯 보였다. 아내는 집안에서 주로 명령을 내리는 존재였다. "이것 좀 해줘" "안 하고 뭐해" "아직도 안 했어?" 치트키를 지닌 말년병장처럼 누워서 상대를 조종하려 들었다. 반감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나는 아이들이 아내의 가스라이팅에 조종당하지 않기를 바랐다. 부모의 가스라이팅만큼이나 벗어나기 힘든 거미줄도 없으니 말이다.
아이스크림의 유혹만큼 벗어나기 힘든 달콤함도 없다.
'엄마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 얻어 먹을 수 있어'
떡의 유혹을 이겨내야 사람은 성장한다. 상대방에게 조종 당하지 않으려면 자신과 신뢰관계가 형성된 이들에 대해서도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 다행히 아내는 영리한 가스라이터가 아니었다. 나는 아내에게 장모님 역시 당신과 매우 유사한 형태로 상대를 일정한 틀 안에 구속하려드는 성향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말이라는 게 참 무섭다. 한 번 친밀도나 신뢰감을 형성하고나면 그가 하는 말의 절반은 생각 창고에 무혈입성하니 말이다.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보면 굳이 내가 저 사람의 의견에 동조할 필요도, 남 험담을 시간 내서 들어줄 이유도 없다. 그것이 일종의 아군 확인 작업이나 결속력 다지기 정도라면 가만히 듣고있는 것 역시 동조라봐도 무방하다. 타인에겐 엄정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면서 왜 자기 자신에겐 그리도 느슨한지 살펴봐야 할 부분이다. 내가 아내의 편에 서지 않으면서 아내는 나를 적군으로 인식했다. 그것이 내가 아내의 거미줄을 빠져나오는 열쇠였던 셈이다.
아내를 만나 심리적으로 갇혀 지내다보니 재입대한 기분을 느꼈다. 둘만의 사랑의 결계에 상대를 가두어 두는 방식이 사랑이라한다면 꽤나 구속적인 방식이다.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주변국 또는 타인을 적으로 설정해 험담하는 방식이 군대와 유사하다. 우둔한 지도자는 아군을 적으로 오인하기도 한다. 슬픈 역사다. '이 사람은 내가 만나본 지금까지의 다른 사람과 확실히 달라'라는 암구호를 부모들은 믿어준 걸까? 아니면 '그런 착각에 빠져야 결혼이 가능하지' 하고 웃어 넘긴 걸까? 장모님께서는 딸이 자신처럼 이혼하지 않고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강했다. 사위의 베개에 부적을 넣어두면 아내의 사랑의 결계가 쉽게 풀리지 않으리라 믿으셨다. 그런 장모님께서는 족히 50cm는 되어보이는 칼을 머리 위 매트리스에 넣어두셨다. 이유를 물어보니 꿈자리 뒤숭숭하지 말라고 넣어두신 거라 말씀하신다. 아내의 삶엔 애정이 필요한데 장모님의 무의식엔 검법이 필요한 모양이다. 사랑을 갈구하는 방법 중 하나가 지속적이고 은근한 가스라이팅이 아닐까싶다. 어슷한 모양새가 매우 어색해 보이지만 어찌 하겠는가. 어리숙한 사람이 어린 사랑을 바라는 어줍잖은 태도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