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예쁜 꽃의 벌레
그러려고 그런 건 아녔는데...
아내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연애 당시에는 몰랐는데 신혼 초부터 서서히 부딪히는 부분이 있었다. 다름 아닌 분노조절 장애였다. 아내는 현재 불규칙적으로 우울증 약을 먹고 있으며,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반려식물을 기르고 있다. 쌍둥이 육아는 출산과 함께 자신의 소임을 다한 듯이 나에게 맡긴 채 푸른 풀을 더욱 푸르게 하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식물 가꾸기는 분노 조절과 우울증에 치료가 될 수 있을까?
퇴근하는 길에 포인세티아 화분을 사다 주었다. 평소 일하며 오고 다니던 길에 실내 인테리어가 독특한 커피전문점이 있어 시간 나면 망하기 전에 한 번 가야지 했었는데 그 게 오늘이었다. 여전히 손님이 없던 그곳은 생각보다 인테리어가 갤러리스러웠다. 의자가 장치 미술의 일부처럼 보여 앉기에는 망설여졌고 통창 앞에 나란히 진열된 포인세티아 화분이 눈에 띄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주로 구매하거나 선택하는 일들은 즉흥적으로 진행될 때가 많다. 결혼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랜만에 전에 사귀었던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왔고 별생각 없이 친절을 베풀고 만남이 이어지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상대는 결혼을 전제로 만나길 원했던 것이었다. 나는 그러려고 그런 건 아녔지만 어느새 식장에 있었다. 그냥 가볍게 생각했던 거 같다. 장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간 것도 현재 교제하고 있는 사람이 저입니다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현재의 장모님은 이미 결혼에 대해 이 자리에서 명확하게 의사를 표시해달라 하셨다.
화분 하나로 오늘 하루는 좀 편히 지낼 수 있었을까? 아내의 기분 전환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내 목표(goal)에는 이르지 못했다. 오늘도 여전히 저녁 식사 후 설거지를 하고 개밥을 주며 가습기에 물을 채우고 음식물쓰레기를 버리고 아이들을 재웠다.
아내에게 추천해준 DC 식물 갤러리 고수들은 포인세티아가 벌레가 많은 종으로 추위에 약하고 키우기 힘들어 대부분 그 해를 못 버티고 죽는다 했다. 이미 수 차례 식물들을 저 세상으로 보냈던 터라 별다를 건 없지만 그래도 초록색뿐인 거실에 빨간 잎이 좀 더 오래 머물러주었으면 좋겠다.
예쁜 꽃의 벌레로 사는 삶을 생각해 보았다. 내가 택한 삶은 척박한 곳이라 벌레가 없었다. 나도 예전엔 누군가에게 예쁜 꽃이었을 텐데 나이가 들고 더는 키가 자라지 않아 그저 그런 꽃에 지나지 않았다. 다행히 시들기 전 벌레가 찾아왔다. 그런데 그 벌레는 자신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주인공이며 나를 나무라 여겼다. 그늘을 제공해 주었지만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이제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주인공이라 말한다. 지난 1년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벌거벗은 임금님을 모시는 재단사처럼 살아왔다. 나는 누군가에겐 벌레, 또 다른 누군가에겐 예쁜 꽃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