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른 아버지들처럼 주말에 경기도 인근으로 캠핑을 가거나 여행을 다닐 수 없었다. 가족을 구성하는 중요한 덕목인 집과 이동수단 둘 중 하나가 마땅하지 않아서다. 아내가 소개한 다른 사람들은 은행에 의지해 집과 차를 소유한다. 나에겐 은행처럼 든든한 아버지가 있었다.
"걱정 말아라. 다 살아날 구멍이 있단다. 나도 외벌이로 아이 셋 키우지 않았느냐."
아버지가 살던 시대는 그 게 정말 가능했다. 경유 가격이 리터 당 400~600원 사이였고 트럭커로 아이 셋 키우는 게 가능한 시절이었다. 대신 누나들은 대학 등록금을 지원받지 못했다. 두 분 다 취업 후 대학을 나왔다. 아버지가 살던 시대에 나는 전업자녀로 살고 있었다. 공장 사람들이 상차를 도와 기사대기실에서 컵라면과 믹스커피를 마시면 되는 시기였다. 내 시대엔 내가 상하차를 한다. 회사에서 인력 감축을 한 연유에서였다. 방학이면 아버지와 함께 경기도 일대의 목장을 돌아다니며 25kg의 사료를 날랐다. 밤 늦게 한강변 도로에 트럭을 주차해도 주차위반 딱지가 붙지 않았다. 지금은 간헐적으로 밤 9시 10시에도 주정차 단속 차량이 돌아다닌다. 시대가 각박함을 요구한다. 당연하다. 경유 가격이 2~4배 가량 뛰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아버지의 월급보다 적은 돈을 벌고 있다.
가족과 함께 떠나는 이동이 부담스럽다. 강아지 두 마리를 키우고 있다보니 강아지를 맡기는 비용과 차량을 렌트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주말에 여행을 다닐만한 심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 시간동안 배달 일을 하면 쓰는 돈만큼을 벌 수 있었다. 아내는 남편이 자신과 가족에게 인색하다는 결론을 내린지 오래였다. 실은 까다로운 것인데 말이다. 티나지 않는 까다로운 까칠함, 이 게 내가 아내와 결혼한 이유였다. 아내가 요구했던 경찰박물관 일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경찰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였다. 나를 지켜주는 존재라 생각하기보다 내가 잘못을 저질렀을때 나를 연행해 갈 사람들이란 인식이 있었다. 나는 어째서 죄를 지은 것처럼 사는 것일까.
아내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내게 직접 일정을 짜보라 말했다. 다음 날 나는 준중형 차량을 예약했다. 아버지 차량을 빌리자니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함께 다녀오자고 하자니 아이 둘 챙겨야하는 부담이 있었고 그렇다고 차만 빌려서 다녀오기도 뻘쭘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불안이 많은 사람, 미안한 감정이 들면 상대에게 말하지 않는 회피형 존재였다. 대학 때 만난 여자친구에게도 똑같이 대했다. 군입대 후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고 미안한 마음에 이병 월급으로 받은 돈을 백일휴가 때 여자친구 손에 쥐어주고 싶었으나 거절 당할까봐 두려워 몰래 여자친구의 쇼핑백에 넣어두었던 사람이다. 전후 과정이라도 설명해주었으면 좋았을텐데 하필 여자친구도 자기 감정을 소극적으로 표현했던 사람이었다. 몇 달 후 여자친구는 편지에 반지를 돌려보냈다. 이별만큼은 적극적이었다. 콜렉트콜이라도 자주 했어야 했는데 시간이 모자랐다. 반복되는 일과에 할 이야기가 많지 않았고 어떤 날은 다른 부대원들이 공중전화를 사용 중인 시간이 많았다. 나에겐 모자란 시간이 타인에겐 다르게 적용되었다. 군대도 분단도 경찰도 사회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내는 함축된 언어를 즐겨쓴다. 개소리, 미친놈, 니가 그렇지 뭐 따위로 나를 포장해 주었다. 오전 등원 때 노란 햇빛이 마음에 걸렸다. 저 예쁘게 내리쬐는 햇살에 아이들 사진 찍어주고싶네 생각이 스치자 아이들은 쌩하고 킥보드를 타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린이집 앞에서 브레이크를 잡지 않아 초록색 인조잔디 경사발판에 키스한 모양이다. 딸 둘을 키우는 어머니께서 아들의 자빠짐을 목격하시고는 일러주신다. 관자놀이에 빨간 물감 두 줄이 생겼다. 적당한 길이의 그림자가 차가운 공기를 따스히 감쌌다. 집에 돌아와 아이들이 먹다 남긴 아침 식사를 버리지 않고 내 입에 넣었다. 이 게 내 아침 식사다. 강아지들이 삐쭉거린다. 예전에 집에서 키우던 개들은 사람이 먹다 남긴 음식들을 섞어 먹으라 주었는데 개들이 챙길 몫을 주인이 가져간다. 입이 악어처럼 튀어나온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간다. 마침 어린이집에서 인근 놀이터로 햇빛을 쬐러 나온 행렬과 마주쳤다. 아들의 빨간 피부는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어린이집 친구들이 강아지를 만져본다. 여럿이 함께 만질 수 있게 닥스훈트의 허리가 시소처럼 길어진다.
해가 지는 질감도 포근했다. 하루 중 길지 않은 축복의 시간이다. 딸은 엄마를 닮아 햇빛을 보거나 쬐면 재채기를 한다. 아마도 신께서 그녀의 몸을 간지럽혀서 호명반응을 하는 것 같았다. 아들은 겁이 많지만 보조바퀴를 떼어 두 발로 자전거를 타고 싶다 말한다. 아직은 손이 작아 브레이크 레버까지 손가락이 닿지 않는다. 나는 엄지 손가락으로 자전거 핸들을 잡는 것을 포기하고 모든 손가락을 뻗어 브레이크를 잡으라고 알려주었다. 대신 한 손으로는 핸들을 꽉 움켜쥐고 있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딸은 아직 두 발 자전거 주행은 무리다. 아들과 딸이 손을 잡고 어린이집으로 다시 복귀한다. 무리들 중 가장 뒤에 따라가면서 뭐가 그리 신났는지 몸이 45도로 틀어진다. 기분의 온도 역시 45도쯤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