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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백지 Nov 04. 2024

위로

다음에 만나면 위로의 말이라도 전해줘야겠어. 아이들을 데리고 병원을 다녀온 같은 동 옆라인 어머니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어 있더라고. 3주 동안 항생제 처방을 받았는데 아이 상태가 전혀 호전되지 않았대. 더 큰 병원은 주차 자리조차 없어 길에서 대기하다 진료를 보고 힘들었다고 토로하더라고. 저번엔 교회 앞에서 아이들과 함께 기도하고 계시더라고. 나는 신을 버렸는데 그녀는 아직 신께 기도하고 있더라고. 믿는 자에겐 복이 있지만 그만큼 큰 시련도 주시는데 말이야. 축복만 있지 않아. 결혼과 자녀 양육 역시 마찬가지야.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나오면 만사형통하리라는 길거리 전도 아주머니가 주신 사탕은 시더라고. 사랑은 달콤한데 말이야.

아내는 휴무일에 정신과 진료를 보고 왔어. 결혼 후 우울증이 지속되어 꾸준히 치료 중이거든. 약을 복용 중이지만 드라마틱하게 상태가 좋아진 건 아니야. 어쩌면 최악으로 치닫는 것만 막아주는 치료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 우리 아이들만해도 만성 비염으로 세 달 넘게 병원을 다니고 있어도 상태가 좋아질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거든. 유아 대부분의 시기를 아픔을 지닌채로 살아간다는 건 세상에 대한 면역력을 기르고 있다는 행위로 인식돼. 아이와 의사소통이 어느 정도 되는 시기부터 품안의 아이들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고 부모들은 착각하지. 집 안에서 보이는 모습과 아이들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서로 다른 아이도 있는데 말이야. 그 사람의 삶을 살지 않은 이상 우리는 그저 관찰자에 불과해. 신도 내게는 그런 존재야.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며 집에서 울던 아내를 딸 아이가 걱정해주더라고. 아빠의 부어있는 오른쪽 다리를 보고 갑자기 울음을 광광 터뜨리는 딸을 보고 누워있던 내가 더 놀랐어. 딸이 어디를 접질린 건가? 어디 아파서 이리 서럽게 우냐고 딸에게 물었더니 아빠 다리의 푸른 멍자국과 붓기를 보고 놀라서 울었다고 하더라고. 반면에 아들은 엄마 우는 거 처음 봤다고 신기해 하더라고. 그 게 남자와 여자의 인식 차이라 재밌었지. 아내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집 남자들의 기계같은 성격에 한 숨을 내쉬었지만 나는 알게 되었어. 아빠를 닮은 아들이 남자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비운이지.

"아빠도 울어?"

아들이 묻자 내가 말했지. 아빠도 자주 운다고. 얼마 전엔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 슬퍼하는 연기자 아버지를 보고 눈시울이 붉어졌어. 작은 화면으로 보는 이야기인데 마치 내가 겪은 일처럼 눈가에 마중물이 차오르더라고. 내가 아프거나 사라지면 아기 새들이 세상의 고난과 위험에 잘 견뎌낼 수 있을지가 걱정되더라고.

나는 아내처럼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지 않아. 아내보다 우울증상이 심각한 상황임에도 우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감정이 결혼 후 느끼는 스트레스여서 이 상황 자체가 바뀌지 않는 이상 약을 먹는 게 무슨 소용일까 싶더라고. 가끔 타인의 고통에 눈물을 흘리다 보면 교회 수련회 기도 시간이 끝난 자리처럼 개운해질 때가 있어. 눈을 질끈 감고 뜬 세상은 변한 게 하나도 없는데 말이야. 자기 감정만 차곡차곡 정리가 되어도 마음이 깨끗해졌디고 느껴. 잠을 한 숨 푹 자고나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좋아지는 기분들이 약을 대신해주는 것처럼 두 가지 모두 그런대로 일정시간 살아갈만큼 에너지를 제공해 주니까 그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돼. 마음껏 울고 웃고 떠들다보면 어느새 상처도 조금은 치유가 되는 느낌이야. 시간이 곧 신이 되는 세계관이야.

나는 약대신 금주와 금연을, 아내는 매일 술을 마시면서 주기적으로 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어. 지금은 아내보다 내 상태가 조금 더 호전된 거 같아 보여.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말이야.





오르막길 위로 오르려는 포클레인의 모습에 즐거워하는 아들, 깔고 뭉개고 떨어지고 부딪히고 밀고 이기고 빠른 것들의 힘의 논리를 좋아한다. 아들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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