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투스트라 너마저

딸래미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by 이백지

'부모님은 나를 어찌 키우셨을까?'

자녀를 키워보면 계속해서 질문하게 된다. 이 힘든 길을 내 부모는 어찌 걸어오셨을까? 아내는 예고대로 오빠네로 향했다. 설 전 날 오후 1시에 출발해 다음 날 집에 오는 일정이다. 아이들은 쿨하게 엄마를 보내준다. 현관까지 따라 나오거나 하지 않아 사뿐히 즈려밟을 필요 없다. 어제 시댁 식구들과 만나 맥주와 막걸리를 섞어 마신 탓에 숙취로 고생했지만 장모님의 "술은 술로 풀어야지" 한 마디에 용기를 얻고 떠났다.

4~6세 때의 첫째 둘째 조카와는 동네 놀이터나 아이스링크도 셋이 다녀올 만큼 순해서 문제없었는데 자녀 분들은 집에서 노는 것조차 수행을 요구한다.

저녁으로 뭐 먹고 싶냐고 선택권을 유니에게 주었더니 짜장면이라 한다. 주문을 하고 그동안 낮에 먹은 그릇과 젓가락 수저 등을 설거지했다. 음식이 도착하자 오니는 우동을 찾는다. 여기서부터 불안했다. 분명 짜장면을 시킨다고 일러두었는데 왜 우동을 찾는 걸까? 믿었던 유니마저 뭐가 맘에 안 들었는지 안 먹겠다고 울고 불고 난리다. 이 대환장 파티에 위버멘시가 필요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짜파게티나 끓여 먹을 걸 짜장면을 먹고 싶단 유니를 원망해본다.

원래 '삶이란 견디기 힘들다. 그러나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마라! 우리는 모두 사랑스러운 노새가 아니던가?'

아내가 알려준 "안 먹을 거면 나가"의 공격이 통했다. 유니를 거실로 내보낸 후 오니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가 질투를 유발했다. 오니 역시 적절히 호흡해 주었다.

"누난 안 되겠어~"

사랑이 넘치는 주방의 모습에 유니는 내 곁으로 와서 비비적거린다. 자존심 상 차마 드라마 파리의 연인 박신양처럼 "잘못했다, 먹고 싶다" 말은 못 하지만 몸의 흐느적거림과 웅얼거림의 멈블 랩이 청자를 감동시킨다. 이것이 조선 힙합이다.

두 아이가 먹는 태도에서 느꼈다. 놀이와 재미를 추구하는 오니는 짜장면과 볶음밥을 내 그릇에 옮겨 담고 다시 가져가고를 반복하며 흙놀이를 하는 포클레인과 덤프트럭을 연상케 하였고, 유니는 나보다 많이 먹는다는 것을... 사실 이런 결론은 4살 딸에게 미안하고 사랑과 관심을 더 바랐던 것일 수 있다.

아빠는 노새이다. 그러나 자식까지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로 만들 순 없다. 적절한 교육이 필요하다. 대치동에서 자라는 아이들처럼 어린 나이에 어학원 다니고 학원에 과외에 특강까지 모두 다 챙길 여력은 안 되지만 공부에 흥미나 재능이 없다면 다른 생존 기술을 학습시킬 의무가 있다.

내버려 두어도 알아서 잘 크는 아이도 개천에서 용 나는 꼴로 존재하지만 아이들이 보고 배우는 대상은 여전히 부모가 처음 아니던가. 재혼이 아닌 이상 부모도 부모가 처음이라 많이 서투르다. 부모의 기대는 아이가 어릴수록 연예인이나 유명인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부모나 자식 둘 중 하나는 삶이란 거대한 파도 앞에 휘청대며 자기 앞가림 만이라도 잘 해냈으면 하고 바랄 것이다.

부모가 가진 게 많거나 욕심이 많으면 아이가 지치고, 반대로 아이가 기대 이상의 재능을 보일 때에는 부모가 힘겹다. 뒷바라지는 늘 뒤가 없다. 자기가 가진 모든 걸 내어주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자식을 키우는 일 역시 그러하다. 나 역시 그렇게 자라왔다. 나는 이 희생이 당연하게 생각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신기하게 부모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시더라. 그릇의 차이인가 보다.


초록 헤어핀은 싫다고 한다. 아내가 집에 없어도 왠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저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첫째는 그릇을 모두 비웠고, 둘째는 비움과 채움을 반복하다 나갔다. 나보다 덜 먹는 인간 만나기 쉽지 않은데 내 아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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