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이 팽창해 네 살이 되었다. 뚜렷한 경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몇 살?"이라고 물으면 어제의 세 살은 오늘의 오답이 되기도 한다. 날짜변경선처럼 인위적으로 구분한 경계에 혼돈이 생긴다. 모든 세 살과 네 살의 어린이들이 겪는 고통이다. 분명 어제는 맞는 대답이지만 오늘은 틀렸다고 한다. 뭔지 모를 아님에 손가락 하나를 서서히 편다.
언어는 분명해지고 목소리에 힘도 실린다. 신이 인간으로 격상되어 언어를 부여받는다. 거짓을 말하기도 하고 이해관계를 따져 대답하기도 한다. 싫은 게 많아질 때이다. 왜 싫은지 물으면 아빠는 소크라테스가 된다. 나를 들여다보면 비로소 알게 된다. 나는 왜 어린 시절 그토록 '그냥'이란 단어를 좋아했을까? 이름이 그냥이란 친구가 있었다면 "너랑 사귀고 싶어"라고 고백했을 텐데 아직 귀인을 만나지 못했다.
전등 스위치로 빛을 발견한 신은 다시 신의 위치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언어가 또렷해지는 만큼 피부의 상처 또한 더디게 치유된다. 언어를 획득하지 못한 이들은 신과 인간의 경계인 천사로 남는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21번 염색체를 하나 더 부여받는다. 신의 선물이다.
가진 게 많아지는 네 살은 질서를 거부한다. 그래서 아빠는 엄격해지기로 한다. 글씨도 궁서체로 쓰고 있다. 퇴근길에 도포를 두르고 집에 들어와야겠다. 흰수염고래처럼 고래고래 소리쳐보지만 물 속이라 아이들 귀에 전달되지 않는다.
자세히 보니 귀가 덮여있다. 세 살 보다 많아진 머리카락으로
"아빠 죄송해요"
클리셰를 남발하지만 돌아서면 다시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변모한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 손언진 씨처럼 예쁘다. 딸 말고 예진 아씨. 20년 전부터 예뻤다. 태평하면 좋으련만 부모는 아이들이 잠들었을 때에나 태평함이 깃든다.
아이가 보금자리를 떠나 새로운 둥지를 틀 때까지 우리는 휴전 중인 상태로 국지전을 벌일 것이다. 저마다의 애록고지를 두고 산을 오르는 시시포스의 삶이 반복된다. 부모가 된다는 건 시시포스의 삶을 자처하는 일이다. 그 낭만을 나는 조카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어때? 어린 삼촌의 모습이야"
부모가 밀어주면 멀리 날아가겠지?
시간이 돌고 돌아 내가 어려지고 조카들이 어른이 되었다. 영원한 젊음도 영원한 아름다움도 없다. 그저 좋은 시기를 지나고 있을 뿐이다. 두 돌은 세 돌이 되어 훈수 둔다. 직관과 혜안의 마지막 시대가 도래했다.
아름다움은 젊음 앞에 당당한가? 살이 아름다운 시기는 짧고 삶이 아름다운 이는 지극히 소수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려면 자신의 살을 희생시켜 삶을 예술로 좁혀야 한다. 상을 일치시켜 실상과 허상의 경계를 구분 짓고 초점을 맞춰본다. 그대의 광축은 삶에 올바르게 안착되어 있는가. 매일 경계에 두어 의심해 본다. '꽉 잡아. 세게 밀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