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시작에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도움을 주셨다. 국민학생 때에는 아버지께서 어디 휴게소 보따리상에게서나 구입했을법한 이름 모를 필름 카메라를 사 오셨다. 뷰파인더 말고도 상단에 펜타프리즘 대신 상이 뜨는 괴랄한 형태의 카메라였다. 이제 우리 집도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중세시대 거부들이 그림쟁이 불러다가 가족 초상화 남기듯 이제 우리 가족도 얼굴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지하 101호에 찾아든 반지하라는 한 계급 위의 햇살이 찾아온 셈이다.
어머니께서는 라디오 방송에 사연을 보내는 취미가 있었다. 하나 터졌나 보다. 국민학교 때는 케이크를 사연 소개비로 받았는데 대학교 때는 콤팩트 디지털카메라가 집으로 왔다. 캐논 A100, 100만 화소 카메라였다. 저장매체도 4MB~ 16MB 단위였다. 그 걸로 여자 친구 얼굴 많이 찍었다. 물론 지금의 아내는 아니다.
그 무렵 즈음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구입한 첫 DSLR을 들고 어머니와 단 둘이 여행을 떠났다. 울릉도와 독도를 다녀오는 일정이었는데 일정 중간에 내가 가보고 싶은 곳도 경유지로 설정해두었다. 기차나 배, 버스를 이용하며 잠은 찜질방에서 잤다. 식사도 회나 고급 음식이 아닌 소박한 백반 위주였다.
DSLR이 필요한 이유는 장노출 사진이 아름다워서였다. 독도를 다녀온 후 추암에 들렀다. 지금에서야 차라리 카메라 대신 어머니 식사나 잠자리 좀 편하게 모실 걸 후회가 든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지 않아 부모님과 함께 셋이서 여행을 떠났다. 이번엔 외도였다. 이번엔 집에서 10년 이상 타고 다닌 마티즈 차량을 이용했다. 여전히 잠은 찜질방이었다. 섬까지 다다르는 건 배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섬까지 다다르는 수단은 달라졌지만 숙식은 이전과 동일했다. 좀 더 편안한 곳으로 모시고 맛있고 비싼 걸 드시게 했어야 했는데 그때는 그 여행이 어머니와 떠나는 마지막 여행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로부터 1년 후 어머니께서는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일본에서 찍은 사진이다. 각자의 창에 바라보는 입장도 서로 다르다. 같은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지만 속마음은 알 수 없다.
아내는 나와는 다른 삶을 살아왔다. 나와는 고등학교 때 잠깐 사귀다 헤어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의 부모님 또한 이혼을 하셨다. 짧은 시간 동안 큰 이별 두 번을 경험하자 아내는 변하게 되었다. 말년 휴가 때 아내가 하비 덴트처럼 마음에 화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지나치게 심취해 다큐를 찍어보자고 권했다. 물론 거절당했다. 아내는 예나 지금이나 주변 친구들의 의견에 잘 휘둘린다. 군대 휴가차 나온 사람이 다시 만나자는 말에는 성욕 해결이라는 숨은 의도를 잘 파악하라는 친구들의 조언이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그때 다시 만났다면 결혼까지 진행되지는 않았을 듯하다.
헤어진 사람과 다시 만나는 건 그다지 추천하지 않는다. 왜 헤어졌는지에 대해 무감각해진 거였는데 다시 만나다 보면 예전의 느낌은 돌아오지 않고 그때와 달라진 상대를 확인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동일한 경험을 했던 수많은 무덤에 계신 분들의 묘지에 이렇게 쓰여있다. '있을 때 잘해'
각자의 섬에 잠시 머물다 가는 연애와 그 섬에 갇혀 오랜 시간 구조를 바라는 결혼 생활은 섬의 성격이 서로 다르다. 여행의 삶은 행복하지만 원주민의 삶은 여행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아이들과 이별 여행을 떠나야 한다면 호주로 떠나고 싶다. 호주에 찜질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잠은 편히 자고 싶다.
한국이 겨울일 때 호주 멜버른은 여름이다. 단기 어학연수 가서 사진만 찍다 왔다. 부모님과 누나들이 지원해준 돈으로 잘 놀다 왔다. 살면서 갚아야지. 조카들에게
잠에서 깬 아들이 아빠가 곁에 없어서 슬펐다고 운다. 호접몽은 아니지만 부모와 자식 간에는 헤어져도 다시 만날 수 있다. 지금도 가끔 어머니가 해주신 닭볶음탕이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