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결여되지 않게 받았지만 물질적 풍요와는 거리가 있는 삶이었다. 그 게 결핍으로 다가왔고 내 어린 시절의 경험이 디폴트 값이 되었다.
아직 몰라도 될 나이, 넌 공부에만 전념해. 여자는 나중에 커서 만나도 돼. 학생은 공부에 집중해야지 등의 방식을 올바르게 수행했던 건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나 내 생각과 월급이 쌓이면서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살 수 있었다. 원하는 대로 사는 건 아니었지만 집, 차, 여자 이런 것들에 눈을 돌리지만 않으면 적당한 만족을 누리고 살 수 있었다.
책임져야 할 대상이 주변에 없으면 온전히 나를 위해 돈을 쓰고, 외국에 사는 어린이에게도 후원이 가능하다. 어떤 이는 아프리카에 사는 벗은 여자들에게 불쌍하다고 후원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섹시한 측은함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돈이 없을 때는 돈을 가진 이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고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킥보드 하나 떨어지는 게 없다.
학생은 충고나 조언에 절대적으로 취약하다. 명절엔 더더욱 그렇다. 자신을 방어하고 싶어도 그럴만한 경험이나 생각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어른들의 생각을 강요받는다. 열이면 열 조언의 성격도 전부 다르다. 셋 중 둘이 이 방향이라 하면 맞는 말처럼 들린다. 일부 깨어있고 명석한 두뇌를 가진 아이들은 자신을 열심히 방어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나열하지만 언제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다. 어른인 부모의 도움이 필요한 꿈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명절에 조카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간이 부족했다. 어느 대학으로 진학할지 전공은 뭐로 정할지가 궁금해서 운을 띄웠는데 여기저기서 걱정과 조언이 쏟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와 고모가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데 둘째 딸 역시 간호사가 꿈이라 하니 현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엄마는 걱정이 크다. 굳이 힘든 길을 가려하는 딸이 안쓰러운가 보다. 삼촌인 나는 둘째 조카가 어릴 때도 타인을 먼저 배려해주고 착하더니 여태껏 착해서 신기하기만 하다. 오빠처럼 자기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첫째 조카는 음악을 만든다. 아이돌 댄스음악을 만들고 있는데 여전히 이쪽 시장은 인맥이 최고의 무기라 말한다. 삼촌은 실력을 겸비한 인맥을 주장했다. 기본도 없고 인맥만 있는 기믹질은 잠깐 흐름 잘 만나 순항할 순 있어도 오래가기에는, 하긴 이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과 시장에 누가 오랫동안 열정을 태워 신을 뒤엎으려는 전복을 꿈꿀 수 있을까? 쉽지 않다.
전문적인 영역일수록 어른들의 조언 횟수는 줄어든다. 그리고 뭐든 모르는 단어로 대화하면 전문가의 영역이 된다. 의사의 언어와 판사의 언어가 그렇다. 대중은 이해하기 어렵다. 사회 초년생일 땐 어른들의 대화가 신기했다. 사람 이름을 여럿 부르고는 걔 아냐고, 알지 그럼. 정치인이든, 자신이 몸 담고 있지 않은 곳이든 이름 난 사람의 이름을 대고 아는 것만으로도 인맥의 줄을 타는 바우덕이 같았다. 어느 분야든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사람 한 두 명은 알고 있어야 대화가 가능할 것만 같았다.
이번 명절에 내가 둘째 조카에게 해준 말은 어른들의 조언을 오지랖으로 듣고 신경 쓰지 말라는 거였다. 진심으로 조언을 해줄 거였다면 명절만은 피해달라고... 관심의 무게를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힘겨워 보였다. 결혼 적령기가 되면 결혼정보업체 명함이라도 건네줄 판이었다.
나는 남들에게 이름이 거론되며 꾸준히 팔리는 사람이었던가? 나 역시 근근이 밥 벌어먹고사는데 조언은 마치 업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의 강연처럼 구구절절하다. 무시할 건 무시하자. 아무 도움 안 된다. 결국 아직 모를 길을 가는 건 나고, 결혼을 하든 혼자 살든 살아야 하는 것도 나다. 아내라는 방송통신윤리위원회가 옆에 있어 심의에 어긋나는 언행은 제재가 가해졌다.
결국엔 어른들의 조언에 자유롭기 위해서는 더 똑똑하고 명석해야만 한다. 그들이 가보지 못한 길을 걸으면 키보드 워리어들도 숙연해진다. 조언의 숲을 빠져나오니 손금의 미래가 펼쳐진다. 마치 미래는 정해져 있기라도 한 듯 손금의 해석으로 미래를 규정한다. 이 얼마나 토테미즘적인 모임이란 말인가.
다음 명절엔 차라리 책을 추천해주어야겠다. 나는 요즈음 이런 책을 읽고 있는데 넌 요새 관심 있는 게 뭐야?라고 묻고, 들어줄 줄 아는 귀를 가진 어른이 필요하다. 입이 너무 많으면 사운드가 겹친다. 그 말 많던 텔레마케팅 전화도 명절엔 전화하지 않는다. 말도 쉴 땐 쉬어야지. 근데 난 왜 쉬지 않고 쓰는가? 아내도 나처럼 쓴다.
"엄마 내일 출근 안 해?"
"응 아빠만 출근해, 아빠가 돈을 벌고 엄마는 주로 쓰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