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의 자아

by 이백지

이불 -> 애불

여보 -> 애보


뭐 이리 애정을 깃들이는지 죄다 '애'로 묶어 부른다. 첫째는 말이 빨랐다. 래퍼처럼 빠른 게 아닌 언어 구사가 둘째보다 빨랐다. 둘째는 침착했다. 자신만의 루틴이 있는 듯했다. 엄마 뱃속에서 세상에 나올 때도 누나를 배려했다.


'먼저 가 난 이미 틀렸어'


병원 기준치인 2kg에 모자라 아직 자신만의 언어와 몸이 자랄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첫째는 둘째의 양수를 뺏어 먹었는지 무럭무럭 자랐다. 네 살 아이가 아빠만큼 먹고 마신다. 인풋이 좋은 만큼 아웃풋도 좋다. 걸음도, 뜀박질도 빨랐고 운동신경도 좋은 편이다. 한 발로 중심을 잡으면서 공을 잡는 연습도 제법 잘 소화한다.


첫째는 둘째를 위해 언어의 교사가 되어주었다. 반면교사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둘째의 언어가 알을 깨는 과정에서 첫째가 큰 도움을 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둘째가 같은 말을 반복해서 되풀이하는 걸 보고 걱정이 많았다. 번 이상 "아빠, 저기에 모기가 있어요"라고 구간 반복을 강요하는 영어학원 선생님 같았다.


'우리 아이가 자폐 증상이 있는 건가?'


자폐 관련 영상을 밤마다 찾아봤다. 이름을 불렀을 때 반응하는지, 아빠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하는지 여부를 살펴보았는데 아빠의 간절함과 달리 다른 곳을 볼 때가 많았다. 가끔 대답도 하지 않고 하던 놀이에 열중할 때가 많았다. 특히 놀이터에서 모래 놀이를 좋아하는데 한 번 자리를 잡으면 20~30분째 그 자리에 앉아 모래를 모으고 붓기를 반복했다.


아빠는 자신만의 세계에 웅크리고 있는 둘째가 하루빨리 알에서 나오기를 바랐다. 인큐베이터를 탈출했어도 아직 정신적으로 세상이 안전하다고 여기지는 않는 듯했다. 가끔 발가락을 죄다 웅크린 채 걷는 것도 그렇고, 발레리나처럼 발가락으로만 점프하는 모습도 애잔한 느낌이었다. 그 무렵 첫째 아이는 묵묵히 둘째의 알 껍질을 밖에서 두드리고 있었다. '같이 눈사람 만들지 않을래?'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안나가 엘사를 찾듯 끊임없이 둘째의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 그런 누나의 구애에 동생은 마침내 자신만의 알집을 탈출했다. 압축이 해제되어 참 다행이다. 아마 누나란 존재가 없었다면 동생은 인큐베이터 밖은 숨 쉴 수 없는 세상이라 여기고 더 이상 껍질 밖을 궁금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TV는 멋있게 보는 거다.


한동안 첫째는 자신의 이름을 누나로 알고 있었다. 아빠의 이름도 아빠, 엄마의 이름도 엄마. 그런데 아빠도 할아버지를 아빠라 부르자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지구는 아빠가 많은 멀티버스구나.' 놀이터에서 놀 때도 처음 보는 동네 오빠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난 누나야"


누가 봐도 네가 동생인데 다짜고짜 다가와 자신을 누나라 말하는 아이와 그 옆에서 흐뭇하게 웃고 있는 아저씨를 본 아이들의 반응은 주머니에서 동전이라도 꺼내 손에 쥐어주고 싶은 측은한 눈빛이었다.


첫째는 요즘 나를 여보라 부른다. 아내가 나를 여보라 부르며 일을 시키면 다 들어주니까 첫째에게 여보란 의미는 '열려라 참깨'정도의 마법 주문처럼 들렸나 보다. 나 역시 어릴 적 누나들을 언니로 불렀다. 학교에 갔던 언니들을 위해 오전반 마치고 일찍 집에 돌아온 나는 계란 프라이를 해주겠다며 프라이팬을 태웠다. 온 집안이 매캐한 연기로 가득했다. 후드가 없던 주방이라 계란 프라이 대신 매캐한 연기를 선물해 주었다. 누나들은 불에 탄 음식은 암을 유발한다며 먹지 않았다. 아마도 그때 불이 나지 않았던 건 요리에 그만큼 열정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그 후 나는 요리에서 배제되었고, 남편을 요리하는 아내를 만나 아이들이 생겼다. 두 번의 유산 끝에 얻은 소중한 쌍란 생명들이다.


엄마가 씻으러 간 사이 아빠가 있는 주방은 놀이터가 된다.


출산은 인간이 유일하게 신에게 접근하는 순간이다. 많은 이들이 그러한 순간을 경험하기 위해 세상에 없는 것들을 창조해낸다. 영화와 음악, 그림과 시가 그러할 것이다. 자신의 재능을 살려 작품에 숨을 불어넣지만, 생명에 비견될만한 위대한 작품은 없다. 나는 내 작품들이 유리알 구르듯 부드럽고 유연하게 어른이 되기를 바란다. 작품을 남기는 행위는 닥스훈트의 길고 긴 몸이 배변패드 밖으로 삐져나와 소변을 바닥에 휘날리듯 피할 수 없는 견주의 운명이다. 인생은 길고 소변은 피할 길 없다. 바닥을 닦으며 바닥을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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