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면 강해지는 학원 태권도, 생존을 배우는 음파음파 수영, 바이엘 하권부터 손가락의 다음 목적지를 잃어버렸다. 피아노 대신 다닌 미술학원은 오후 라디오 방송을 듣다 오는 시간이었다. 미술 학원 선생님은 엄마 아빠처럼 '지금은 라디오 시대' 취향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항상 딱 붙는 청바지에 다리를 꼬고 앉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연필이나 붓을 잡으셨다.
입시 미술은 진지하지만 국민학생의 미술은 기초 과정이라 붓을 든 팔의 무게만큼 배움의 터치도 가볍다. 케첩을 짜듯 물감을 짜고 물도 듬뿍 축여준다. 선생님은 매일 지적을 하셨다. 아내처럼 하나서부터 열까지 맘에 안 드셨나 보다. 어디 한 번 넌 얼마나 잘 그리나 보자 하고 바라보면 붓은 사람을 가려 춤을 추더라. 내 붓과 연필이 막춤이라면 미술 선생님의 춤은 현대 무용처럼 붓조차 미간을 찡그리며 격정적인 숨을 내쉬었다. 다르네.
강남으로 이사를 가면서 미술과 태권도 학원을 접었는데 나는 다시 펼치고 싶다고 말했다. 부모님께서는 예체능 말고 공부에 집중하기를 바라셨다. 그래도 농구는 보내주셨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잠실 학생 체육관에서 연세대 농구부 대학생 형이 농구의 기본을 알려주었다. 미술 선생님만큼 열정적으로 가르쳐 주셨다. 수료 마지막 날에는 서장훈 선수를 비롯해 다른 연세대 선수들을 초청해 그동안 갈고닦은 단체 레이업 슛을 보여주며 끝나는 아름다운 잔치였다. 당시 선생님께서는 내가 농구에 재능이 있다고 판단, 휘문중학교 감독님께 물건 하나 팔려했으나 키가 작아서 안 팔렸다. 이후에 휘문고 실내 코트에서 연습하고 있는 학생을 보았는데 이미 190cm가 넘는 키로 공을 튀기고 있었다.
키와 무관한 운동을 찾다가 테니스를 시작했다. 막상 해보니 키와 무관한 운동이 아니었다. 네트가 높았고 내가 쳐낸 볼은 베이스라인 밖으로 아웃되기를 반복했다. 비 오는 날을 제외하면 학교 끝나고 저녁 먹기 전까지 테니스 코트에 붙어있었다. 가끔 동호인 어른들께서 저녁도 사주셨다. 부담 없이 랠리도 해드리고 난타도 해드렸다. 네트를 사이에 두고 연습 볼 치는 걸 랠리나 난타 치자고 하신다. 3년 정도 볼을 치다 보니 이 걸로 대학 갈 수준이 되었다. 지금은 가천대학교로 바뀐 경원대에서는 테니스 종목 실기로 체대에 합격했고, 고민 끝에 중앙대학교 사회체육학부로 대학을 진학했다.
대학에 다니면서 여름 방학을 활용, 배드민턴과 스쿼시 볼링을 배웠고 겨울방학엔 스키를 배웠다. 한 달 배운 볼링으로는 수능 성적만큼 점수가 나왔다. 스키는 엔조이가 답이다. 폼 생각 안 하고 생각 없이 타는 스키를 엔조이 스키라 부른다. 아마추어 선수처럼 시간 단축시키겠다고 종아리, 허벅지에 비닐랩 감고 미라처럼 탈 거 아니면 다치지 않고 천천히 내려오는 게 안전하다. 스키 데몬스트레이터로 지도자 할 거 아니고서는 적당히 만족하며, 즐기면서 타는 게 마음이 편하다. 보통 1년 차 스키어들이 콧대가 하늘을 찌른다. 장비병에 빠지는 것도 이 시기 무렵이다.
243점, 하우스 볼로 친 볼링 최고 기록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성남훈, 이기명, 김홍희 선생님께 사진을 배웠다. 마지막 주에는 열명 남짓 인원이 공동으로 사진을 인화해 갤러리에 작품을 소개했다. 대학생도 있었고, 은퇴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하시려는 어르신도 계셨다. 테니스에서 구력이 깡패이듯, 수영장에서 어머님들이 아가미가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었던 순간도 있었다. 사진에 대한 열정도 나이를 먹을수록 색이 짙어진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말한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지만 제발 나이 들어서는 그만 좀 배우시라고. 젊은 시절 충분히 배우고, 나이 들어서는 배운 것을 실천하거나 가르쳐야 할 게 아니냐고. 그 게 올바른 삶의 방향인 것은 맞지만 열정이 피의 온도를 넘어선 이들은 숨이 다할 때까지 배움을 최고의 재미로 느낄 것이다. 그래서 많은 부모님들께서는 말씀하신다. '너 그렇게만 공부했으면 서울대 갔어'
왜 어른들께서는 과거 명문대 졸업장을 최고의 무기로 여기셨을까? 지금은 서울대 나온 취업준비생, 유튜버가 차고 넘치는데 말이다. 매번 산업안전 보건 인터넷 강의를 클릭하고 있는 걸 보면 대한민국 사회는 아직도 개인의 배움이 모자라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좋은 직장과 안정적인 노후는 낙타의 바늘구멍처럼 흐릿하다. 공무원이 최고의 직업인 사회에 더 이상 어린아이들이 태어나지 않고 있다. 어릴 적 철봉 위를 걸어 다녔던 서울 신양 초등학교가 '폐업'이라고 구글 지도에 적혀있다.
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