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먼저 봄을 알린다. 쉼 없이 동으로 달려도 봄은 오지 않는다. 향기는 남에게서 온다. 타인의 향기가 내게 닿아 투명한 꽃망울을 안아달라 한다. 그리운 님의 향기가 내게 닿지 않으면 콧망울이 찡긋해진다.
실패와 거절을 견뎌낸 꽃이 봄의 향기에 다가갈 자격을 갖춘다. 보잘것없는 민둥산에도 꽃내음이 찾아온다. 계절의 순환은 언제나 숭고하다. 지구의 회전을 그리고 공전을 땅의 기운으로 확인할 수 있다.
어른들에게 가장 무서운 건 통장잔고가 비어있는 계절이다. 봄의 기운이 느껴지질 않는다. 통장은 자전적이게도 공전하지 않는다. 당분간 일요일에도 일을 해야겠다는 이야기에 아내는 적잖이 당황한 듯하다. 주말은 육아에서 벗어나 편하게 충전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으나 당장 다음 달 월급이 코로나 확진으로 무급 휴가 반타작이 날 생각에 벌써부터 불안하다.
22도로 맞춰진 난방 온도를 19도로 낮추자 춥다며 21도로 1도만 줄이자 한다. 이번 달 도시가스 요금은 절충안인 21만 원이 나왔다. 고정지출 비용을 줄이고 싶어도 쉽지 않다. 결국 아내는 겨울에도 항상 입고 있던 반팔, 반바지에서 반팔-긴바지로 갈아입었다. 불안감이 채워진 냉장고는 유통기한과의 시간싸움이 진행 중이고 이미 필수품이 된 물티슈는 박스 단위로 집에 배송된다. 물티슈 회사는 역삼동에 본사가 있다.
아내는 하루 2시간 일하는 학교 급식 아르바이트에 지원했다고 하지만 15년 전에도 똑같은 공고가 있던 아르바이트다. 자신의 주거 지역에서 가까운 학교로 배정된다고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가 못하다고 알려주었다. 나도 학창 시절에 지원해 보았지만 오고 가는 대중교통비를 제하면 실제 수중에 들어오는 돈은 노력 대비 미천한 수준이다. 관리자 급의 나이를 아르바이트 자원으로 부리기도 쉽지 않다.
회사 물류 창고에 일하는 인턴 직원의 나이도 41살이다. 2월까지 일하고 퇴사하는 그의 발걸음 뒤에 이어질 직원은 구해지지 않았다. 본사에 정규직 전환을 검토해 달라는 의견서를 제출했으나 이뤄질지는 의문이다. 10년을 일했지만 나보다 어린 직원 후배는 단 한 명뿐이다. 상명하복의 군대식 문화와 영업 강요와 압박에 많은 이들이 회사를 떠났다.
고인물 잔치가 벌어지는 회사 인력 구조의 기이함은 자회사로 분리된 3년이란 기간 동안 신입 정직원 채용은 단 한 건도 없었고, 오로지 시간제, 기간제, 계약직 등으로 모자란 인력을 충원하고 있다. 아내와 자녀 계획에 대해 입장이 달랐던 건 성장이 정체된 사회와 반바지에서 긴바지로 갈아입히기 힘든 고통을 감내할 준비가 안된 가정 내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였다.
아빠의 봄은 오지 않을 듯하다. 쌍둥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정해진 결과다. 봄은 아이들에게만이라도 찾아왔으면 좋겠다.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야기하는 구세대를 믿지 말고 생존 가능한 성장 지점까지 배웅해 주는 게 아빠가 해야 할 인생 과제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입술이 부르트게 찢어져도 당신이 뭐가 힘드냐며 핀잔을 듣는다. 겨울엔 아빠 새가 먹이를 찾아 둥지를 떠나도 허락된 먹이가 많지 않다는 사실에 입술이 바짝 마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