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다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께서도 배송 일을 하셨는데 주로 경기도 일대를 돌아다니셨다. 집 근처에 있던 건국 사료 공장에서 4.5톤 트럭으로 한우나 젖소들이 먹는 사료를 농장에 납품하는 일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방학이 되면 아빠를 따라다녔다. 조수석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농장에 도착하면 트럭 짐칸에 올라 사료를 내리기 편하게 빼꼼 밀어드렸다. 사료 한 포대 당 무게는 25Kg으로 아버지는 한 번에 세 포대까지 한쪽 어깨에 짊어지고 사료를 나르셨다.
소는 혀가 길다. 통로 맞은편에 사료를 쌓아 두어도 머리를 내밀어 파충류처럼 혀를 던질 수 있다. 채찍처럼 혓바닥이 2중 3중 종이 포장된 사료 포대를 침과 함께 타격하면 사료가 봇물처럼 흘러내린다. 암소는 겁이 많지만 수소는 폭군이다. 콧바람도 씽씽 나온다. 농장에서 얻어먹은 따뜻한 우유는 일반 소비자가 마시는 우유보다 더 달고 맛있다. 일을 하고 어깨나 머리에서 김이 날수록 그 맛이 진해진다.
아버지는 보통 하루 두 탕을 뛰셨다. 일이 많은 날에는 세 탕까지 뛰셨다. 새벽 4시쯤 일어나 차를 몰고 공장에 대기하고 있으면 공장 사람들이 짐칸에 사료를 실어 주신다. 기사 대기실도 있고 차에서 대기할 수도 있는데 차에서 자고 있으면 사료를 던질 때마다 차가 흔들린다. 아버지는 늘 어머니께서 챙겨주시던 도시락으로 점심을 드셨다. 식어버린 도시락 밥과 반찬을 차에서 드셨다.
출퇴근 시간까지 계산하면 하루 평균 14~16시간을 일하신 셈이다. 매일 허리가 아프시다며 허리를 밟아달라고 하신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지금도 아버지께서는 한쪽 팔꿈치가 펴지지 않는다. 그 당시 팔에 힘을 과하게 주는 동작을 반복해 근육이 펴지지 않는다고 하신다. 그렇게 외벌이로 삼 남매를 키우셨다. 몸이 쇠한 시기에는 직접 법원 경매에 뛰어들어 저렴한 가격에 집도 구입하셨다.
아파트에 소가 사는지 9인분을 주문하셨다.
산전수전 다 겪은 아버지 눈에는 난 차량 경정비도 할 줄 모르는 풋내기일 뿐이다. 어제도 12시간을 채워 일했지만 아버지랑 함께 일하던 때를 떠올리면 2시간은 더 일할 수 있었다. 빨리 들어오라는 아내의 독촉 전화에 일을 마무리하였다. 일요일인 내일도 일 하러 나간다는 아빠의 출근 소식에 아들은 애도를 표한다.
"아빠 출근해서 슬퍼"
"잘 자~ 꿈에서 만나"
"꿈에서 만나면 슬퍼"
기승전 슬퍼 쇼를 외치다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