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속 신선한 세상

냉장고를 채우는 가장은 늘 쉰내가 난다.

by 이백지

아이고, 어느 집에 불이 났지?

산책 후 돌아와 보니 우리 집이었네.


오전 9시 30분, 강아지 산책 나가는 길에 본 부릉 오토바이, '일요일 아침부터 어느 집이 배달을 시켰지?' 산책 후 돌아와 보니 우리 집 현관에 음식 봉지가 놓여있다. 10분은 돌다 왔는데 현관 앞에 그대로 있었네. 감기에 걸린 아내가 오늘은 배달 나가지 말라 부탁한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오전 7시 출근 오후 7시 퇴근을 주 7일 연속으로 한다. 물론 주말엔 조금 일찍 일을 마친다.


일요일 오전 강아지 배변패드를 치우고 밥을 만들려고 쌀이 들어있는 냉장고를 열었더니 그 안에 화가 들어있었다. 가끔 주말에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들을 버리는 건 정수기 점검처럼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손님과 같다. 나는 집에 있으면 화가 난다. 밖에서는 10년 전부터 편의점 도시락, 편의점 샌드위치, 삼각김밥을 지나 빅맥 런치세트로 점심을 치르는데 집 안엔 먹지 않은 음식들을 곰팡이가 먹고 있어서다.


저번엔 곰팡이가 핀 과일과 떡을, 이번엔 뜯어두고 한 달을 넣어둔 두부와 아이스크림처럼 단단해진 카레를 버렸다. 유통기한 보름이 지난 우유 두 통은 아직 유제품을 만든다고 말한 지 열흘이 지났는데 시작을 안 한 모양이다.


집에 있으면 전 날 먹은 식기류들이 쌓여있고 열흘 이상 치우지 않은 안방의 머리카락 더미들, 욕창이 안 생길 정도로만 누워있는 아내를 보면 두통이 밀려온다.


내가 낳은 아이는 나보다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주변 환경은 점차 나약해져만 가는데 정부의 환상인 지속 가능한 성장에 베팅해야 할까? 성장의 춤판은 이미 끝이 나고 잔치 음식을 기다리는 사람은 많은데 입장료를 걷고 있네. 이미 판을 떠난 사람들의 연금을 쥐어주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지갑만 들여다보는 관료를 올려다보네.


주말 오전 자전거 음식 배달 중 공원에 고양이 한 마리가 의자에 누워 자고 있다.



기름값 대신 나를 태운다.


일가족 살해 후 자살 뉴스 소식은 클릭을 피할 수 없다. 내 예상은 더 많은 자살이 있을듯한데 기사화되지는 않는 듯하다. 월급이 통장에 들어오고 3일 뒤 통장잔고는 0원이 되었다. 각종 보험료와 아들에게 물려줄 청약통장에 납부할 돈 5만 원은 배달 주급으로 채워야 한다. 이번 달은 아파트 관리비도 배달 주급이 들어온 후에야 납부했다. 두 달치 보험료가 연체되었다는 안내전화에 이젠 무덤덤하게 반응한다.


밀려있는 납부금액을 어떻게 채워나갈지를 걱정하는 내게 집 냉장고의 세상은 다른 세상이다. 폭염주의보와는 달리 24시간 냉기 가득한 이 세상엔 1000ml 우유가 4개나 들어있다. 2개는 날짜가 지났다만 점심값 아끼려고 빅맥을 먹는 내가 사는 세상과는 달리 부유한 가정의 모습이라 뿌듯한 애처로움이 든다.


기름값을 걱정한 누나가 지인의 전기자전거를 무료로 나누어주셨다. 스로틀 방식의 전기자전거는 페달을 밟지 않아도 자전거가 이동하지만 누나가 준 전기자전거는 PAS 방식이라 사용자가 페달을 밟을 때 살짝 등 떠미는 속도를 제공해준다. 지난 주말엔 오전에만 39km를 자전거로 배달하며 달렸다. 오후엔 비가 와 차로 운전하며 배달했다. 그렇게 8시간 남짓 일해도 하루 10만 원 벌기 힘든 배달 비수기이다.


누군가를 탓하는 데에만 허비하며 사는 인생도 무가치하게 여겨진다. 나는 생존에 집중하며 살고 있다. 코로나 이전과는 삶의 태도가 판이하게 다르다. 내가 일하지 않으면 냉장고는 채울 수 없다. 빚으로 집을 구입하는 건 부자들의 몫이다. 가난한 사람은 빚으로 냉장고의 식료품을 구입한다. 마음은 점차 가난해지고 있다. 언제까지 나 혼자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퇴근 후 두 아이의 웃음을 보고 있으면 폭우 속에도 비를 맞으며 음식 배달을 하는 가장의 모습이 이해가 간다.


나는 이해가 간다. 일가족 살해의 뉴스가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한국 사회의 민낯을... 그러나 100년 후 통계청에서 제시한 대한민국 인구 천오백만 명이라는 예측치에도 가장은 묵묵히 AI에 빼앗긴 직업에 맞서 가족들에게 검은 봉지에 담긴 치킨 한 마리를 사다 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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