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돈과 없는 사람

나는 투자에 실패했지만 인생에 실패하지 않았다.

by 이백지

새벽 4시 20분에 출발해 오후 9시 30분 퇴근, 거울을 들여다보니 17년 후 내 얼굴이 보였다. 12시간 가량 운전하느라 음료는 최대한 마시지 않고 장시간 자동차 히터의 뜨거운 기운을 받아 얼굴이 택배 상하차처럼 재조립 당한 기분이었다.


"야, 빨리 내려, 내려! 리프팅할 시간 없어!"


얼마 전부터 나는 집에서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다. 지입차로 입사한 회사가 자회사로 분리되며, 개인사업자 신분에서 정직원으로 바뀌었다. 직장 동료들과 이미 퇴직한 이들을 중심으로 퇴직금 소송이 진행됐다. 법원은 개인사업자 형태의 고용일지라도 직원의 개념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퇴직금이 입금되었지만 아내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장모님께 코인 투자 비용 원금 200만 원을 돌려드리겠다고 하자 아내의 의심이 시작됐다.


"돈이 어딨다고?"


"응 퇴직금 받아서 그 걸로 돌려드리려고"


코인 투자는 실패했고, 아내는 왜 미리 퇴직금 들어오는지 말하지 않았냐고 나무랐다. 장모님께 드린 돈은 다시 아내의 통장으로 입금됐다. 장모님에게도 그 돈은 없는 돈이라 생각하고 투자해 보라고 하셨던 모양이다. 나에게 퇴직금도 없는 돈이었다. 2천은 연 5% 이율의 적금 통장에 넣어뒀다. 미래에 꼭 필요할 때 쓰게될 돈. 덕분에 나 역시 집에서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다.


코인에 들어있는 돈이 크지 않아 다행이다. 대출이라도 해서 투자하고 싶었는데 은행 창구에서 공인인증서 비번을 몰라서 대출 심사를 못받았다. 지금도 기억이 안난다. 해외거래소에 있는 라이트 코인 소액도 비번이 기억나지 않아 로그인을 못하고 있다. 투자는 기억력 좋은 사람의 몫이다. 난 그저 묵묵히 노동수익으로 요행없이 내가 없어도 충분히 돌아갈 세상의 부품으로 살아야겠다.


이제는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우상향할 거라는 환상을 믿지 않는다. 개미는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식량을 비축한다. 그저 묵묵히 정해진 동선을 바쁘게 움직일 따름이다. 네비대로 움직이는 가장은 개미의 하루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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