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로 입양을 간 프레디는 두 주일 간 서울에 머물게 되면서 친부모를 찾는다. 친아버지는 쉽게 만나지만, 친엄마는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아 몇 년의 시간이 흐른다.
프레디는 프랑스에서 양부모가 아주 잘 돌봐주고 양육하여 21살 어엿한 숙녀가 되었다.
그런데 굳이 친부모를 만나고 싶을까?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프레디를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누구인가?
나를 낳아준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버려졌던 군산은 어디인가?
프레디는 그것이 알고 싶다. 단지 그뿐이다.
프레디 친아버지는 친어머니가 도시에 살고 싶어 떠난 후 재혼을 해서 딸 둘을 낳고 단란하게 살고 있다. 할머니도 살아계시고, 고모도 영어가 능통한 엘리트이고, 새어머니도 좋은 분이다.
프레디는 한국에서 은혜라는 이름을 가졌었다. 전쟁 직후 너무 살기가 어려워 은혜의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얘기한다.
프레디는 계속 친엄마를 만나고 싶어 한다. 1년, 2년, 3년의 세월이 흐르고, 입양센터에서는 부모가 거절하면 다시 연락을 하면 안 된다는 규정을 어겨가며 담당자가 애정을 쏟아서 결국 프레디 모녀는 상봉을 하게 된다. 둘은 서로 부둥켜안고 운다. 그러나 친모가 알려준 이메일은 잘못된 주소이다. 얼굴 한번 본 것, 단지 그뿐이다.
프레디는 자유분방하다. 계속 성장한다. 입양아라는 핸디캡 속에서도, 그리움이라는 감정 앞에서도, 친모의 거절이라는 장애물을 딛고 계속 달려간다. 미친 듯이 마시고 춤추고 자유롭게 연애한다. 직업도 여러 번 바꾼다. 평화를 위해 미사일을 파는 무기상 셀러가 되기도 한다. 프레디의 삶에는 거침이 없다.
나는 누구인가?
한국에서 버려진 아이이다.
나는 누구인가?
프랑스에 입양되어 잘 자란 숙녀이다.
그러나 뿌리가 궁금하다.
낳아준 부모가 누구인가?
그래서 찾아낸다.
보고 싶었으니 얼굴을 본 것이다.
그러나 얽히지는 않는다. 다 알았으니 된 것이다. 상황이 어려워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들었으니 된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것이 두려울 때가 있다.
프레디를 보면서 그 어떤 상황도 환경도 우리를 잡아둘 수도 묶어둘 수도 없다는 걸 깨닫는다. 프레디처럼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으면 된다. 내가 누구이든 중요하지 않다. 계속 변화할 수 있는가? 계속 전진할 수 있는가? 그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프레디처럼 아픔의 현장인 서울을 꼭 다시 가보아야 한다. 나의 서울은 어디인가? 그 시작점에 서서 상처와 아픔과 고통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 그것이 우선이다. 그곳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