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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순오 Dec 04. 2023

이화인이 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2023 이화 크리스마스 음악회와 이화 80 송년회 글을 적고 나니 줄줄이 사탕처럼 이화에 대한 추억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내친김에 내가 이화인이 된 사연을 조금 더 적어본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에 갈 무렵 이화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집에서는 형편이 안 좋다고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을 강력하게 반대했고, 가려면 졸업 후 곧 취직할 수 있는 여상에나 원서를 넣으라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해서 대학에 가고 싶었다.  만일 그럴 수 없다면, 그냥 고교진학을 못할 거라면, 이화여고에 떨어졌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부모님 허락도 안 받고 공동학군으로 이화여고를 썼다. 그곳에 추첨이 안 되면 일반 인문고에 배정될 수 있었다. 당시는 고교시험제도가 폐지된 후  얼마 되지 않아서 공동학군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추첨을 통해서 서울 4대 문 안에 있는 명문고에 진학할 수 있는 제도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강북구에 살고 있는 내가 이화여고 추첨된 것이다. 우리 중학교에서 딱 2명이 배정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나였던 것이다.


시골에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는 우리 집에서는(나는 중학교 2학년 초에 서울로 전학을 왔다) 내가 시험을 쳐서 이화여고에 붙은 줄 알고 흔쾌히 진학을 허락했다. 입학할 때 이화여고는 우리 아버지의 자랑거리였다.


그렇지만 학교에 다니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당시 나는 삐쩍 마른 데다 빈혈도 있어서 1시간 이상 만원 버스를 타고 서서 등하교하는 일은 거의 죽음에 가까웠다. 거기다가 차가 막히면 수업 시작 시간이 간당간당해서 남대문 정류장에 내려서 덕수궁 돌담길을 뛰고 또 뛰었다. 그래도 교문에서 주번에게 잡히기 일쑤였다.


 좋아하는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내가 학교에 다니는 것을 그만두었으면 하고 계속 새벽부터 잔소리를 해댔다. '여자 공부 많이 해봐야 쓸 데가 없다'는 것이다. '여자는 자고로 시집을 잘 가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이제나저제나 학교 그만 둘 생각만 하며 이화여고에 다녔다. 그래도 문반 반장에다 밀알회 봉사 동아리도 하면서 그럭저럭 학교는 다니고 있었다.


여고 1학년 가을, 경복궁에서 서울시 글짓기 대회가 있었다. 나는 학교 대표로 나갔는데, 그날따라 글을 지어 내고도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경회루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석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호수로 비칠 때까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집에 가보니 어머니 아버지는 시골에 가시고 집안은 어두컴컴고 휑했다. 동네 사람들이 큰일 났다고, 남동생 둘이 연탄가스를 먹어서 할머니가 데리고 수유역 근처 병원으로 갔다는 것이다. 병원으로 가보니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던 남동생은 즉석에서 숨이 졌고, 7살짜리 작은 남동생은 산소통에 들어가 있었다. 머니는 옆 의자에서 기다리면서 벌벌 떨고 계셨다.


나는 죽은 아이를 데리고 먼저 집으로 와서 혼자 밤을 새웠다. 맥박을 만져보니 뛰지는 않았지만 아직 몸에 온기가 있었다. 어떻게든 아이를 살려보려고 식초를 헝겊에 묻코에 대어도 보고, 이불에 싸서 길 한가운데 흙바닥에  놓아도 보고, 민간요법으로 할 수 있는 것 거의 다 해보았다. 그렇지만 새벽녘이 되자 아이는 푸르뎅뎅 입술도 손발도 싸늘하게 식어갔다. 백열등 불빛 만이 무심하게 누렇게 빛나고 있었다.


이튿날 결석을 한다고 학교에 공중전화를 했다. 담임 선생님이 받으시더니 내가 백일장에서 장원이 되어서 월요일에 시상식이 있다는 것이다.(※시 제목은 <고궁>이었는데, 이화 <거울>지에 실렸는데 지금 나에게는 없다.)


윌요일에 담임 선생님과 교목실 목사님이 우리 집에 오셨다. 직접 와서 보니 사는 형편이 너무 어려웠던지 이후 졸업할 때까지 내가 교목실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그야말로 '새옹지마'가 떠오르는 나의 이화여고 시절 이야기이다. 이화는 내게 가장 힘든 시절을 떠올리게 하지만 또 커다란 사랑을 깨닫게 해 준 곳이기도 하다.


 세월이 지난 후에는 모든 것이 그리움이 된다. 좋은 일뿐만 아니라 안 좋은 일도 그렇다. 기쁨도 슬픔도 아픔도 모두가 다 추억이 된다.  내가 이화인이 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러하기에 이화는 내게 언제나 그리움이다!

정동교회와 이화여고 이름표
이화여고 동문
이화 교정
류관순 열사 동상
류관순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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