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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순오 Feb 10. 2024

가슴에 온기가 도는 시간, 운보의 집과 운보미술관

청주여행(4) : 운보의 집, 운보미술관

운보의 은 청주여행을 온 이유이다. 내 옆에 앉은 짝꿍도 운보의 집에 와보고 싶어서 오늘 청주여행을 왔단다. 보는 내가 좋아하는 화가이기도 하다.


입장료는 개인이 내는 줄 알았는데 아니다. 아마도 지자체에서 내주는 것 같다. 어른 개인 6천 원, 단체 4천 원인데, 암튼 감사하다.


운보 김기창 화백은 1만 원권 지폐의 세종대왕상과 한복 입은 <예수의 생애>를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성지 순례를 갔을 때 어느 성당에서 운보의 그림이 벽화로 그려진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때는 그 그림이 운보 화백이 그린 건 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고, 예수님 모습이 기존 서양인이 아니라 동양인으로 그려진 것이 아주 색다른 그림이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운보의 생활공간과 작업공간 바로 아래 지하 특별관에 예수의 생애 그림이 전시된 걸 보니 그만큼 운보가 애착을 가지고 그린 그림이라는 걸 알 수 있겠다.


운보 김기창 화백은 어려서 유년기에 청력을 잃고 화가가 되었다. 예수의 꿈을 꾸고 예수의 생애를 그렸다. 미인의 꿈을 꾸고 미인을 그렸다.


운보가 생활하던 공간이 오픈되어 있어서 들어가 본다. 호랑이 가죽을 깔고 잠을 잤다.

"왕이 부럽지 않겠구먼!"

관람하는 이들이 얘기한다.

"무섭지도 않았을까? 호랑이 가죽을 깔고 자면은."

옆 짝꿍도 얘기를 한다.

'글쎄요. 무섭다기보다는, 운보는 죽어서 남긴 호랑이 가죽을 깔고 누워서 자신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싶었을 걸요.'

나는 혼자 속으로 그렇게 대꾸를 해본다.


운보 김기창 화백은 주로 한지에 먹으로 수묵화로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그 부드러운 재료들이 합력하여 그림이 될 때 참으로 장엄하고 웅장한 작품을 만든다. 싸우는 두 마리의 소를 그린 <수묵화 습작> <조국통일>, 두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금방이라도 소가 튀어나올 듯, 우리의 소원이 곧 현실이 되어 백두산 천지에 설 수 있을 듯하다.


나도 요즘 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어서 이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눈 속에 피는 매화의 고결한 정신, 은은한 난초의 향기, 찬 서리에 꽃잎을 활짝 피운 국화, 어떤 환경에서도 꺾이지 않는 대나무의 굿굿함, 더 나아가서 산맥의 솟구침과 어우러짐, 오랜 나무들의 인내를 그리고 싶다.


운보 연보가 벽에 쭉 적혀 있다. 거의 두 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 당시에 유치원을 다녔고, 어머니가 명문여고 선생님이다. 아내는 화가 우향 박래원인데, 사진을 보니 꽤미인이다.


운보는 청각 장애는 있지만 그림을 그려서 인정받고 이름을 날린 사람이다. 그림을 선택하고 깊이 몰두했기 때문이리라.


운모작품으로 기념품을 만들어 파는 곳이 있다. 책갈피, 컵받침, 부채, 컵, 운보 그림에 채색하기, 화가들의 책, <예수의 생애> 책 등 다양하다. 하나 구입할까 망설이다가 그냥 온다. 꼭 필요하지는 않아서이다.


집에 돌아가서는 도서관에서 운보에 관한 책을 찾아서 읽어보고 싶다. 그리고 소장하고 싶은 책은 구입을 하리라. 운보를 기억하며 그림을 그리며 운보의 정신을 배우고 싶다.


운보미술관 지하에는 운보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미인 그림, 베트남전 그림, 삽화 등을 자세히 볼 수 있다.


미인은 운보에게 행운의 상징이었다. 발가벗은 미인 꿈을 꾸고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또 베트남 참전 종군을 해서 그 현장을 그림으로 그렸다. 위험하지만 전쟁 상황을 그림으로 그리는 건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삽화도 많이 그렸다. 신문이나 잡지 표지 그림을 주로 그렸다. 운보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들의 의뢰가 들어와서 그렸으리라.  


운보는 삽화에 대해 말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 삽화를 그린 것이 아니라고, 삽화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한 작업이라고, 돈을 위해서라면 다른 것을 했을 것이라고.


운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가 중 거의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화가이다. 우리는 기억한다. 운보가 불과 7살의 나이에 '장티푸스로 청력상실'이라는 절체절명의 상황을 겪었지만,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운보 앞에서 자신이 지니고 있는 물리적, 정신적 한계에 대해서 무어라 변명할 수 없으리라. 다만 게으르고 시도하지 않음을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으리라.


운보미술관에서 나와 야외조각공원 입구로 들어선다.

"뭐 볼만한 게 많이 있나요?"

시계를 보니 탑승 시간이 30여 분 남아 있어서 내려오는 이들에게 물어본다. 야외조각공원에는 운보 이외 다른 조각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서 보지 않고 그냥 가도 괜찮겠다 싶다.

"운보를 꼼꼼히 보았으니까 그러면 된 거다. 기회가 되면 다음에 또 오면 되지 뭐."


그런데 올라갔다 내려오는  남자분이 말한다.

"꼭대기에 운보의 무덤이 있어요."

"아, 그래요? 얼마나 가야 하나요?"

"100m요."

"여기까지 와서 운보의 무덤은 보고 가야지."


조금 더 오르니 길 오른쪽에 '운보와 우향의 묘'라는 나무 팻말이 있다. 나는 운보와 우향의 무덤을 보려고 가파른 데크길을 올라간다. 빠르게 오르니 숨이 차다.


끝까지 오르니 크고 작은 무덤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다. 왼쪽 운보의 무덤은 봉분이 크고, 오른쪽 우향의 무덤은 봉분이 작은데, 정답게 묻혀 있다. 마치 큰 무덤의 품 안에 작은 무덤이 안기거나 기댄 것처럼 애교스럽다. 일평생 서로 함께 하며 사랑과 예술의 혼을 불사른 두 화가의 무덤 앞에서 숙연함을 느낀다.


오른쪽에 운보의 비문, 왼쪽에 운보에 대한 추모시가 쓰여 있다. 왼쪽 추모시를 옮겨본다.


우리 미술의 금자탑


하늘의 섭리런가

일찍이 청각을 잃으시고

오롯이 한평생을

만물의 直髓 그려

이 나라 고유 미술의

금자탑을 이뤘네

체구는 장대하나

숫되기가 소년 같아

만나는 사람마다

허울을 벗게 하니

가시매 그 예술 그 인품

더욱 기려 그리네


추모시 구상

글씨 김동연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 위대한 일을 이루든 못 이루든, 유명이든 무명이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보통사람으로 지극히 평범하게 살든, 건강하든 아프든, 장애가 있든 없든. 죽으면 화려한 무덤을 남기기도 하고 그저 한 줌 흙이 되기도 한다.


산행을 좋아하는 어떤 이는 말한다.

"산이 내가 왔다 간 것을 모르게 하라."


나는 말하고 싶다.

"세상이 내가 왔다 간 것을 모르게 하라."

나는 죽으면 그저 한 줌 흙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우리가 살다 간 흔적은 우리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늘에 모두 기록된다. 그 기록이 우리가 영원을 살 모습을 결정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가장 좋은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가장 안 좋은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말이다. 이것이 내가 가진 기독교 신앙이다.


천국에 간다면 운보 김기창 화백과 아내 우향 박래현 화백을 꼭 만나보고 싶다. 두 사람의 얼굴을 서로 번갈아 보리라. 어찌 그리 정답게 살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을 물어보고 싶다.


그래서 그랬을까? 운보 김기창 화백의 그림은 참으로 따사롭다.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에 온기가 돈다. 운보의 집도 운보미술관도 운보와 우향의 무덤도 그러하다. 넉넉한 가슴을 안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볍다. 설연휴 참으로 복된 청주여행이다.

운보의 집
매표소
운보의 말씀
운보의 집
운보의 집 앞뜰 연못과 정자
운보의 집 앞에서
운보의 집 생활공간
예수의 생애 특별관
운보미술관과 운보 동상
운보미술관 앞에서
운보 김기창 화백
운보의 작품 소 그림 <수묵화 습작>과 <조국통일>
운보 연보
운보의 그림 1만 원권 세종대왕상
기념품 판매
운보가 즐기 는 소재
지하전시실 미인 그림, 베트남 참전 그림
베트남 참전 그림과 기록
신문과 잡지의 삽화와 낙관
야외조각공원
'운보와 우향의 묘' 가는 길
운보와 우향의 무덤
운보 추모시
운보와 우향의 무덤에서 내려오면서 보는 야외조각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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