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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by 서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태복음 7:13-14 말씀)


성지 순례를 할 때 이스라엘 성전을 돌아본 적이 있다. 견고한 성벽이 다 무너지고 스라엘 성전도 군데군데 부서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이 준비하고, 그 아들 솔로몬이 세웠던 이스라엘 성전, 스룹바벨이 포로에서 돌아와 세운 스룹바벨 성전, 내가 기억하는 성전이다.


무너진 이스라엘 성전에서 특이한 부분은 금도 견고하게 서있는 '통곡의 벽'이다. 곳은 우뚝 솟은 벽만 남아 있는데 사람들이 와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벽을 보고 통곡을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제는 함께 모여 예배할 성전도 없어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성전을 다시 짓기 위해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한다.


마태복음 5장~7장까지는 산상수훈이다. 예수님은 주로 비유로 말씀하셨고 늘 가시적인 장소에서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은 심지어는 그 제자들조차도 그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지는 않다. 마치 지금의 우리가 성경 말씀을 잘 못 이해하는 것처럼 말이다.


마태복음 7장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도 그 뜻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나도 그렇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면서 질문을 해본다.

"좁은 문은 어떤 문인가요?"

"이스라엘 성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좁은 문인가요?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좁은 문인가요?"

아마도 많은 사람이 가지 않는 문, 들어가기 어려운 문,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 대충 짚어보아도 좁은 문은 넓은 문과는 대조되는 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많이 가는 문, 들어가기 쉬운 문,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은 문이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이 있는데, 이 소설에서 말하는 '좁은 문'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의 좁은 문이 아니다. 면의 갈등이 있는 문, 신학적 물음으로 신에 대해 의심을 품은 문, 그래서 지드의 <좁은 문>은 종교적으로 한때 금서가 되기도 했던 책이다. 그저 책 제목만 보아서는 신앙인들이 읽으려고 집어 들기 쉬운 책인데 내용은 그 반대인 것이다.


요즘 책들도 제목이 그럴듯해서 신앙적으로 도움이 될까 하여 읽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지금은 잘 살펴야 하는 시대이다. 앞으로는 더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좁은 문'에 대한 의미를 어떤 물리적인 장소라기보다는 '주님 말씀에 잘 따라가는 길'로 정의하고 싶다. 너도 나도 다 가는 길이 아니라 지극히 소수가 가는 길, 진리의 길, 믿음, 소망, 사랑의 길, 섬김과 희생의 길, 환경보호와 홍익인간의 길, 이타적 삶의 길, 사명과 소명의 길, 회개와 중생의 길, 이런 길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아닐까?


내 그림은 통곡의 벽에 문을 내고 두 팔을 들고 서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외치시는 예수님을 그린 것이다. 그곳은 날마다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와서 똑바로 살려고, 신앙대로 살려고 자신을 씻는 곳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실 때, 듣지 않으려는 많은 무리들에게는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이미 아셨을 것이다. 평소에는 그리도 잘 따르던 사람들이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재림의 때에 주님은 통곡의 벽에서 가슴을 치며 울고 있는 사람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목청 높여 외치실 것만 같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서순오, 20호, 아크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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