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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순오 Jan 12. 2023

순간정지(瞬間靜止)

'청별(靑別)'※은 '푸른 이별'이다. 아니 '새파란 이별'이다. 개울 징검다리에서 옷깃으로 스쳐 지나간 첫사랑 소녀에 대한 느낌을 지우지 못해 일평생 삶이 정지되어 버리는 한 소년의 이야기다. 이름 붙여 '순간정지'라고 해본다. 어떠한 사건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소년은 그 순간의 감정을 지우지 못해 고목처럼 늙어간다. 그리고 소녀의  딸로부터 소녀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 순간의 문장이 숨이 막힐듯하다. 긴장에 긴장을 거듭하는 묘사 문장들이 소년의 시간을 붙들어 매고 있다. 단편소설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주는 작품이다. 여러 번 읽고 쓰면서 문장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나의 삶 가운데서도 그렇게 자주 돼 내어지는 순간이 있는지 곰곰 돌이켜본다. 그것이 나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왔는지를. 그렇게 정지된 순간이 이렇게 나이 들어가는 나에게 무어라 말하는지를 듣는다. 역시나 "미안하다"라고 말할까?


첫사랑의 감정을 가진 것은 소년이었고, 소녀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소녀로 인해 소년이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결국 "미안하다"라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어떤 감정을 내어주지 않아도, '거기 있다'는 자신의 존재 자체로 상대방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다면 "미안"한 일이다. 그것이 첫사랑이라도 말이다.


하물며 학벌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돈이나 건강 같은 것은 더하리라. 내가 그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순간정지' 시키고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이 늙어가게 만든다면 그에게 "미안하다"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저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상대방을 제압하고, 서로 자기가 더 낫다고  자랑하기에 바쁜 이 세상에, 상대방의 감정까지 고려하여 미안해 할 수 있는 이 소설은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일까?


아마도 '순수를 향한 갈망'을 얘기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순수"를 위해서라면 삶 전체를 걸 수도 있고, 타인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었던 시절, 점점 '순수'가 사라지는 시대에  소년의 '순간정지'는 조각처럼 고정되어 가슴에 박힌다. '첫사랑'이라면 그 정도는 되어야  감히 '첫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청별(靑別)'은 <몌구리 일화>(백우암, 동천사 )에 나오는 단편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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