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많은 여고시절, 남녀학교 혼성 독서모임을 같이 했던 친구 중에 한 명이 뇌암과 폐암을 앓고 있다. 이제 얼마 후면 다시는 얼굴을 볼 수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하여 오늘 친구들과 서로 연락해서 병문안을 했다.
가보니 '이런 모습을 보여주어 미안하다'라고 말한다.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병을 앓고 있는 그 친구가 우리에게 미안할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면서도 무엇을 이루려고 너무도 애쓴 것이 미안한 이유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항상 바빠서 친구들 모임에도 잘 못 나왔으니까.
친구의 머리는 다 밀어 까까머리이고, 얼굴도 창백한 게 예전의 친구 모습이 아니다. 음식 먹는 것들이 배출이 안 되어 음식도 못 먹고 영양주사로 연명하고 있다.
작년 5월에 뇌암이 발견되었는데 이미 너무 많이 진행되어 수술이 불가하고, 또 7월에 소폐암이 발견되었는데 전신에 모두 퍼져있는 상태라 담당의사가 '곧 이별준비를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는데, 지금까지 7-8개월을 살아온 것도 기적이라고 한다.
그 친구는 우리 친구들 중에 가장 잘 나가는 친구이고,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명문 모 대학에 단과대학원장을 하고, 활동도 활발하게 하던 친구인데 참 안타깝다.
대체 '목숨'이란 무엇일까? 모 의사는 환자에게 찔려 숨지고, 사고로 질병으로 죽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흔한 일인데, 우리는 '목숨'에 대해서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사실 너무 많은 나이까지 살고 싶지는 않은 사람 중 하나이다. 아직 건강할 때, 기력이 쇠하지 않고 눈이 흐리지 않고 기억력도 좋은 그런 나이에 죽을 수 있다면 복이라 여긴다.
뭐 하고 싶은 일을 그리 많이 하지는 못했어도 괜찮다. 어차피 인생이란 많이 이루거나 적게 이루거나 목숨이 다한 후에는 그게 그거인 거니까. 고요히 잠자듯이, 아니면 하던 일을 하고 있다가, 그렇게 조용히 갈 수 있으면 좋겠다.
부부, 부모자식, 친인척, 친구, 지인들과의 관계도 내 목숨이 다하는 날, 아스라한 기억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부지런히 애착을 가지고 기록하는 브런치나 블로그나 카페의 글들도 주인 없는 빈 집이 될 것이다. 우리가 죽은 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브런치나 블로그나 카페를 관리하는 분들이 폐허가 된 인터넷 공간의 집과 방들을 다 없앨 런지도 모른다. 아니 인력이 부족하다면 그냥 그대로 방치해둘 수도 있다. '카페지기 부재중'이라는 명찰을 단 채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사진과 글들이 유령처럼 여기저기 떠다니게 될 것이다.
'목숨'이란 소중한 것이다. 이 땅에서 주어지는 단 한 번의 생이기에, 누가 대신 살아줄 수도 없는 내게만 주어진 나의 삶이기에 값진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목숨은 찰나이며 유한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기독교신앙을 가진 나는 죽음 이후에 새롭게 시작되는 영원한 생명을 믿고 감사드리며, 이 땅에서의 '목숨'에 대해 초연한 자세를 가질 수가 있다. 조금 먼저 가고 조금 나중에 가는 차이가 있을 뿐 누구에게나 동일한 죽음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가 있다.
"왜 사느냐고 묻거든 웃지요"
라는 시가 있다.
그러고 싶다. 늘 웃으며 천천히 느리게 걸어가고 싶다. '목숨'이 주어져 있는 동안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내 눈에 가슴에 꽂히는 사람들은 아주 많이 깊이 사랑하고 싶다.
※ 이 글을 쓴 지 약 한 달 후 새벽에 친구는 세상을 떠났다. 고이 잠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