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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순오 Jan 27. 2023

목숨에 대하여

 많은 여고시절, 남녀학교 혼성 독서모임을 같이 했던 친구 중에 한 명이 뇌암과 폐암을 앓고 있다. 이제 얼마 후면 다시는 얼굴을 볼 수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하여 오늘 친구들과 서로 연락해서 병문안을 했다.


가보니 '이런 모습을 보여주어 미안하다'라고 말한다.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병을 앓고 있는 그 친구가 우리에게 미안할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면서도 무엇을 이루려고 너무도 애쓴 것이 미안한 이유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항상 바빠서 친구들 모임에도 잘 못 나왔으니까.


친구의 머리는 다 밀어 까까머리이고, 얼굴도 창백한 게 예전의 친구 모습이 아니다. 음식 먹는 것들이 배출이 안 되어 음식도 못 먹고 영양주사로 연명하고 있다.


작년 5월에 뇌암이 발견되었는데 이미 너무 많이 진행되어 수술이 불가하고, 또 7월에 소폐암이 발견되었는데 전신에 모두 퍼져있는 상태라 담당의사가 '곧 이별준비를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는데, 지금까지 7-8개월을 살아온 것도 기적이라고 한다.


그 친구는 우리 친구들 중에 가장 잘 나가는 친구이고,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명문 모 대학에 단과대학원장을 하고, 활동도 활발하게 하던 친구인데 참 안타깝다.


대체 '목숨'이란 무엇일까? 모 의사는 환자에게 찔려 숨지고, 사고로 질병으로 죽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흔한 일인데, 우리는 '목숨'에 대해서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나는 사실 너무 많은 나이까지 살고 싶지는 않은 사람 중 하나이다. 아직 건강할 때, 기력이 쇠하지 않고 눈이 흐리지 않고 기억력도 좋은 그런 나이에 죽을 수 있다면 복이라 여긴다.


뭐 하고 싶은 일을 그리 많이 하지는 못했어도 괜찮다. 어차피 인생이란 많이 이루거나 적게 이루거나 목숨이 다한 후에는 그게 그거인 거니까. 고요히 잠자듯이, 아니면 하던 일을 하고 있다가, 그렇게 조용히 갈 수 있으면 좋겠다.


부부, 부모자식, 친인척, 친구, 지인들과의 관계도 내 목숨이 다하는 날, 아스라한 기억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부지런히 애착을 가지고 기록하는 브런치나 블로그나 카페의 글들도 주인 없는 빈 집이 될 것이다. 우리가 죽은 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브런치나 블로그나 카페를 관리하는 분들이 폐허가 된 인터넷 공간의 집과 방들을 다 없앨 런지도 모른다. 아니 인력이 부족하다면 그냥 그대로 방치해둘 수도 있다. '카페지기 부재중'이라는 명찰을 단 채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사진과 글들이 유령처럼 여기저기 떠다니게 될 것이다.


'목숨'이란 소중한 것이다. 이 땅에서 주어지는 단 한 번의 생이기에, 누가 대신 살아줄 수도 없는 내게만 주어진 나의 삶이기에 값진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목숨은 찰나이며 유한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기독교신앙을 가진 나는 죽음 이후에 새롭게 시작되는 영원한 생명을 믿고 감사드리며, 땅에서의 '목숨'에 대해 초연한 자세를 가질 수가 있다. 조금 먼저 가고 조금 나중에 가는 차이가 있을 뿐 누구에게나 동일한 죽음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가 있다.


"왜 사느냐고 묻거든 웃지요"

라는 시가 있다.


그러고 싶다.  웃으며 천천히 느리게 걸어가고 싶다. '목숨'이 주어져 있는 동안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내 눈에 가슴에 꽂히는 사람들은 아주 많이 깊이 사랑하고 싶다.


 글을 쓴 지  한 달 후 새벽 친구는 세상을 떠났다. 고이 잠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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