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에게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너를 생각하면 우리 사이에도 적당한 거리가 필요했다는 생각이야.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부모자식 간이라도, 부부지간이라도 말이야. 알 게 있고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 거지.
그런데 너는 나에 대해서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어. 물론 나도 너에 대해서 그랬고. 우리는 여고 2학년 때 같은 반이어서 처음 만났지만 너는 나를 위해서 늘 기도한다고 했지. 나는 집안 형편 때문에 자주 학교를 그만 둘 생각을 했고, 다니고 있던 교회에도 조금은 시들했었어. 내가 신앙에 회의를 가질 때면 너는 늘 그럴 때도 있다면서 이야기도 나눠 주었어.
너네 집은 아버지 어머니가 신앙심이 깊었고 언니들도 그랬지. 모두 같은 교회를 다녔고 봉사도 많이 했어. 너는 그중에서도 작은 교회를 옮겨 다니며 섬겼지. 성가대 지휘도 했고 성전 꽃꽂이에다 피아노 반주, 교회학교 선생님도 했어. 전공을 하지 않았는 데도 작은 교회에서는 모든 게 가능했지. 1인 다역 봉사활동이었어.
그런데 우리 집은 아주 다양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어. 종교박물관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정도였지. 외할머니는 원불교, 어머니는 불교(지금은 개종해서 천주교), 둘 다 아주 독실한 신자였지, 무교라고 말하는 우리 아버지와 할머니는 늘 조상신을 위해 제사를 지냈으니까 실상은 유교였던 거고.
결혼을 해보니 우리 시어머니가 또 남묘호랑객교 독실한 신자였고, 우리 시누 중에는 또 특별한 불교 신자가 있었어. 거기다가 모르고 시작했던 나의 영어사업은 사업주가 여호와의증인 신자였네. 내가 아주 종교박물관 한 복판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야 했던 거야. 그 깊고 깊은 다양한 종교의 터에서 내가 계속해서 기독교인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너의 기도가 큰 역할을 했을까? 나는 조금 늦긴 했지만 40대 후반에 신학대학원까지 갔으니까. 꼭 목회를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아무도 안 믿는 가정에서 나는 제1대 기독교인으로서 목사가 되고 싶었던 거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말이야. 아니 신학을 한 후 좋은 글을 쓰고 싶었어. 그 당시 나의 기도제목은 '하나님의 영성을 담고 있으면서도 상상력과 창의성이 뛰어난 언어의 연금술사가 되는 것'이었어.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너는 내가 재수할 때 학원비도 얼마간 대주고 그랬네. 정작 너는 대학에도 안 가고 언니가 하는 피아노와 미술 학원에서 보조교사로 일을 하면서도 나를 위해서 기도한 값을 톡톡히 치른 거지. 나는 끝까지 학원을 다니지는 못했어. 너에게 미안해서 한 3개월 다니고 말았어. 그렇지만 거의 독학으로 여러 번의 재수 끝에, 아니, 대학을 포기하려던 해에 뜻밖에도 아주 쉽게 대학에 합격했어.
그래서 나는 네가 결혼할 때 예쁜 봉투에 축의금을 넉넉하게 넣고, 그 안에 고마운 마음을 담아 구구절절 애틋한 손 편지를 썼지. 그동안 받은 사랑을 얼마라도 갚고 싶었거든. 물론 네가 내게 준 것은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나로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그 후 너는 대학을 나왔고 나도 대학과 일반대학원을 나왔지, 그리고 내가 만학으로 신학대학원을 다니고 졸업식 하던 날이 생각나네. 네가 나를 위해 직접 축하 떡케이크와 카드를 만들어서 가져왔었어. 목사안수를 받는 날에도 축하 꽃다발과 카드를 직접 만들어서 가지고 왔지. 너처럼 내게 정성을 쏟은 친구도 없을 거야.
그리고 신기한 것은 나의 첫 사역지가 네가 다니면서 나를 위해 기도했다는 너의 모교회였어. 면접하러 갔을 때 깜짝 놀랐어. 너랑 같이 여고 시절에 가봤던 바로 그 교회였거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 후 내가 가는 사역의 자리는 항상 너무 큰 곳이었어. 교회도 늘 중형 이상 성도 수가 많은 교회였고, 교육부서에도 아이들이 아주 많았지. 중고등부를 시작으로 유치부, 유년부, 청년부를 거쳐 큰 기관 대학병원 원목실과 지방경찰청과 경찰서 경목실에서 사역했어.
그런데 여자 목사가 큰 교회와 기관에서 목회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어. 거의 24시간 일을 해야 했거든. 잠도 못 자고 집안일도 못하고 교회 일만 했었네.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이겨내고 잘해나갔어.
그렇게 한 10여 년 사역을 하고, 서울에 있는 S경찰서 경목실에서 일할 때였어. 나는 네가 경목실 수요 낮 예배에 와서 피아노 반주도 해주면 좋겠다 생각했지. 너는 나를 위해 기도했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었지. 네가 그동안 집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교회에 다니면서 이모저모로 봉사하던 일을 생각하면 그건 아무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너는 냉담했어. 특별히 하는 일이 없었지만 나를 도우려고는 하지 않았어.
도리어 내게 부탁을 해왔어. 너는 오랫동안 작은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 학원을 접고 다른 미용사업을 하려고 쉬고 있을 때였어. 학원은 한동안 비어 있었지. 너는 나에게 전화를 해서 아주 싸게 놓을 테니 그 학원을 빌려 쓸 사람이 있으면 소개하라고 했어.
우리 경목실에는 경목실장 아들이 휴학 중이어서 수요 낮 예배에 나와서 임시로 반주를 해주고 있었어. 그 청년은 그때 다니고 있는 대학이 마음에 안 들어서 싱어송라이터가 되려고 실용음악과 입시를 다시 준비하는 중이었어. 내가 예뻐하니까 자기 얘기를 모두 나에게 하면서 진로에 대한 상담도 했어. 그 친구가 함께하는 연주팀이 있는데 연습실이 필요하다는 거야. 무료로 사용 가능하거나 월세가 싼 곳이면 좋겠다고 했어. 부모님께는 비밀로 해달라고 했지. 그래서 너의 학원 얘기를 했더니 즉각 너를 만나러 갔어. 가보고는 딱 자기가 찾던 곳이라면서 아주 마음에 들어 했어.
그리고는 나도 모르는 일들이 일어났어. 초등학교 선생님인 그 청년의 어머니가 그곳을 가보지도 않고 계약서도 쓰지 않은 상태에서 기백만 원의 보증금을 네 통장으로 보낸 거야. 그런데 얼마 후 실내장식을 하려고 가족들이 모두 가보고는 장소가 너무 허름하다면서 그 돈을 돌려받길 원했어.
그때부터 갈등이 시작되었어. 너는 보증금 전체가 들어온 것은 계약서를 안 썼더라도 계약이 된 거라서 돌려줄 필요가 없다는 거야. 그렇지만 경목실장 목사님은 내가 끼여 있으니까, 너는 내 친구니까, 장소를 보지도 않고 믿고 돈을 보낸 거라면서 어떻게든 너를 설득해서 돈을 돌려받길 원했지. 둘 사이는 팽팽했어. 너는 절대 안 된다고 했고, 경목실장도 한 발도 물러서질 않았지. 나는 정말 좋은 일 하려다 중간에 끼여서 고래등에 새우등 터지는 격으로 죽을 지경이었지. 결국 너무 괴로워서 경목실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 나 역시도 당시에는 우리 집에 대학생이 두 명이나 있었기에 그 돈을 네 대신 선뜻 돌려줄 수도 없었어.
결국 나는 너와도 경목실장과도 사이가 나빠졌지. 물론 나는 그동안 경험을 통해 언제나 '여기가 막다른 골목이다' 싶으면 새로운 길이 열리곤 했기에 걱정은 안 했어. 다만 그 일로 가까운 사람 둘을 잃은 거지.
그렇지만 내 믿음대로 곧 길은 열렸어. 나는 귀촌을 생각하면서 이력서 지원을 해서 전혀 낯선 곳인 지리산 지역에 가서 여성센터에서도 일을 했었네. 나는 무어든 할 수 있는 자격증과 경력이 있었어. 독서지도, 글쓰기와 논술지도는 꽤 오래 했거든. 컴퓨터도 중급 이상은 다룰 수 있어. 사진과 동영상 편집, 워드, PPT 등도 자유롭게 쓸 줄 알지. 그래서 여성센터에서 초ᆞ중학교 아이들 다양한 체험활동 후 글쓰기 지도하는 걸 했고, 다문화인들에게 한글과 컴퓨터 가르치는 것도 했어. 자서전 쓰기와 독서지도사 자격증 과정을 개설하려고 계획도 세웠었지. 우리 남편이 귀촌을 반대해서 겨우 3개월 만에 다시 돌아왔지만 말이야. 그리고 후에는 신학원에서 강의도 했어.
지금은 작은 교회에서 섬기고 있어. 나는 배우는 걸 좋아해서 할 수 있는 게 더 늘어났어. 그림도 아크릴화로 시작해서 문인화까지 7~8년 그려왔으니까 그림 지도가 가능하고, AI로 할 수 있는 일들과 그림책 쓰기도 가르칠 수 있어. 건강 동아리 형태라면 산행이나 여행 안내도 해줄 수 있을 듯해. 아직 시작은 안 해봤지만 기회가 되면 무어든 해볼 생각이야.
H야!
정말 네가 나를 위해 기도한 거 맞아? 너의 학원 임대와 관련된 일은 누가 잘못한 걸까? 너는 집안사람들이 모두 같은 종교라서 돕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돕는 사람이 별로 없어. 그런데 어떻게 기백만 원이라는 돈 때문에 네가 기도한 내가 사역하는 걸 막을 수가 있어? 우리가 교회에는 헌금도 하는데, 목사님 자녀의 일로 너에게 흘러 들어간 돈을 안 돌려줄 수가 있는 거야?
나는 너에게 말했어. 법적으로는 그렇다 하더라도 도의상 돌려주어야 하는 것 아니겠냐고. 사실이 그렇잖아. 부모의 생각과 자녀의 생각은 다를 수 있고, 미성년자를 갓 넘겼어도 자녀의 선택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러나 또 한편, 경목실장에 대한 아쉬움도 있어.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떠맡기려 한 점 말이야. 원칙대로 하는 거지 중간에 끼여있는 사람에게 자꾸 책임을 지라고 하면 안 되는 거지.
어쨌든 우리의 우정은 그 일로 끝이 났네. 내가 한 번 너와의 화해를 시도했지만 허사였어. 너는 내 전화를 받지도 않더라. 무엇이 너를 그토록 화나게 한 거야? 내가 더 화를 내야 되는 거 아니야? 나는 경목실에 들어갈 때 여자 경목실장도 될 수 있다는 말에 무척 기대가 되었거든. 혼자서 몇 가지 일을 하면서도 기쁘게 했어. 그런데 나를 도울 줄 알았던 네가 도리어 방해를 한 거야. 물론 고의적으로 그런 건 아니지만 결과가 그렇게 되고 말았어.
여고시절, 너는 늘 나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지금도 기도하고 있니? 나를 위해 기도한 거 정말 맞는 거야? 우리가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너는 나를, 나는 너를, 치부까지도 다 알고 있으니까,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가 어려웠는지도 몰라. 우리 사이에 너무 간격이 없었던 거야. 그래서 나는 생각해.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아주 허물없는 관계도 필요하지만 그보다는 조금 간격이 있는 가깝고도 먼 사이가 오래간다고 말이야.
이제 인생의 반이 훌쩍 지나고 후반전을 향해 가는 이 시점에 우리가 이다음에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때 반갑게 서로 얼굴을 마주 보려면 지금 여기서 엉긴 실타래를 풀어야 하지 않을까? 너도 나도 독실한 기독교인을 자처하면서 이렇게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가도 되는 걸까? 글쎄! 나는 네가 이해가 잘 안 되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저냥 지낼 수는 있을 듯한데, 너는 그것도 어려운 거야? 여고 동창회도 같이 나가고 가끔은 식구들 안부도 물어주고 말이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라."
이것은 바로 주님의 뜻이기도 하거든. 주님은 화목제물로 이 땅에 오셨으니까. 앞으로 우리 둘이 풀어야 할 숙제네. 정답은 알고 있으니까 문제 풀기가 조금은 쉬울 수도 있겠네. 나는 늘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어. 너도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거야. 그렇다면 누가 먼저 손을 내밀지, 그때가 언제일지, 그게 궁금해지네. 우리가 둘 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면 그날은 반드시 올 거야. 기다려 볼게. 그 화해의 물꼬가 손 편지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