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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순오 Aug 07. 2024

세례를 주신 E목사님께

  E목사님,

  여고 1학년 5월, 교정에 장미꽃이 눈부시게 피어난 날이었네요. 은은하게 풍기는 꽃향을 맡으며 노천극장 초록빛 잔디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세례를 받았네요. 그때는 제가 다니고 있는 교회가 있었는 데도 왜 학교에서 세례를 받았는지 모르겠요. 아마도 혼자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누가 권하지 않아서 세례라는 게 있는 건 지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학교에서는 친구들도 여러 명 세례를 받았으니까 자연스럽게 함께 할 수 있었고요.


  그 후 E목사님이 지도하시는 <밀알> 동아리에 들어갔네요. 지금은 연락이 안 되지만 같은 반 S라는 친구와 함께 가입했어요. 면접시험이 꽤 까다로왔던 것 같아요.


  저는 그때 <거울> 지라는 학교 신문반에서 기자로 일하고 싶었는데 시험에서 그만 떨어지고 말았어요. 딱 5명 뽑는데, 시험이 꽤 어려웠던 것 같아요. 저는 깡촌 시골에서 중학교 1학년까지 다녀서인지 독서량이 별로 없었거든요. 그때에는 제가 다니는 학교에도 마을에도 도서관이라는 게 없었어요. 물론 집에도 교과서 이외에는 책이 없었고요. 그러니 도시에서 살면서 집에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친구들에 비해서 저는 책을 읽을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던 거죠. <거울>지 기자 시험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책 내용을 물어보는 문제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책 제목과 줄거리 정도는 외워서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책을 안 읽은 사람은 거의 모르는 문제였던 거지요. 그래서 보기 좋게 낙방했요.


  그 대신 저는 동아리 2개를 들었는데. 하나는 문반이었고, 하나는 봉사 동아리 <밀알>이었어요. 제가 욕심이 있었던 거네요. 다른 친구들은 대부분 동아리를 1개만 하거나 아예 안 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저는 2개나 했으니까요.


  당시 <거울> 지는 지금은 고인이 되신 동화작가 신지식 선생님이 지도하셨고, 문반은 시인 임완숙 선생님, 밀알반은 E목사님이 맡고 계셨어요. 저는 2개 반 다 아주 열심히 참여했어요. 문반에서는 반장을 했고, 밀알반에서도 부지런히 봉사활동을 다녔어요. 기억나는 일은 문반에서 <문학의 밤> 행사를 하고 문집을 냈던 일과 밀알반에서 여름방학에 간 농촌봉사활동과 지체장애아동시설인 <향림원>에서  봉사한 일이었어요.


  특별히 충청도 오지 산골 지역에 가서 봉사하던 일은 제가 살던 고향 깡촌 시골의 추억을 떠오르게 해서 좋았어요. 그곳에서 마을학교를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사일도 돕고, 길도 넓히고, 커다란 농약통을 메고 마을 구석구석 후미진 곳을 소독하고 그랬네요. 그때 가르쳤던 애들과는 손 편지를 많이 썼어요. 주거니 받거니 눈물이 나는 손편지들, 고사리손으로 삐뚤빼뚤 쓴  편지들이었지요. 그런데 왜 그랬는지 지금은 단 한 장도 가지고 있지  않아요. 그 아이들과도 자연스럽게 소식이 끊어졌고요.


  , 그러고 보니까 제가 바로 그 아이들이었네요. 초등학교 다닐 때요. 전남 광주에서 대학생 언니오빠들이 우리 마을로 봉사활동을 왔었거든요. 그때 배운 일본 노래가 지금도 기억이 나네요.


  모모따라상 모모따라상

  오또시니 게따 기비당고

  히도시 와따시니 구따사이나


  어느 나라 노래인지도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불렀어요. 수건 돌리기나 꼬리잡기 놀이를 하면서 재미있게 불렀던 노래라 지금도 가끔 흥얼거려질 때가 있어요.


  최근에 인터넷 검색을 해서 찾아보니 일본 동요더라고요. 내용은 이러했어요.



  <모모타로산 노 우타>

   (모모타로씨의 노래)


  1.

  모모타로산, 모모타로산

  (모모타로씨, 모모타로씨)


  오코시 니 즈케타 키비단고

  (허리에 찬 수수경단)


  히토츠 와타시 니 쿠다사이 나!

  (내게 하나 주지 않을래!)


  2.

  아게마쇼우, 아게마쇼우

  (드려요, 드려요)


  이마 카라 오니 노 세이바츠 니

  (지금부터 귀신을 잡으러)


  즈이테 쿠루 나라 아게마쇼우

  (같이 가면 드려요)

  (출처 : https://naver.me/GvFEeZgO  )



  는 이 중에서 1절만 배운 것이었어요. 발음도 정확하지 않고 내용 전혀 모르면서도 신 나게 불렀어요.

  "노래를 가르쳐준 대학생이 아마도 일본에서 온 유학생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일본학과 학생이었을까?"

  그저 짐작을 해볼 뿐이네요. 그런데 알고 보니 복숭아소년 모모타로가 귀신을 쫓는 노래였네요.


  <향림원>에서는 장애우 애들 목욕도 시켜주고 옷도 갈아입혀주고 밥도 먹여주고 같이 놀아도 주었어요. 선물도 푸짐하게 가지고 가서 나눠주었요.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정기적으로 가서 봉사했어요.


  저의 여고시절은 E목님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네요. 세례를 주셨던 목사님이고 그만큼 저를 잘 챙기셨던 요. 저희 집에 남동생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숨진 일이 있었고, E목사님이 담임선생님과 함께 저희 집에 가정방문을 오셨고, 그리고 저에게 교목실에서 장학금을 주셨어요. 그 덕분에 저는 무사히 여고를 다닐 수 있었고요. 모두가 다 E목사님을 통해 보여주신 주님의 사랑이었어요.


   가지가 더 있네요. 제가 첫 번째 신앙수필집을 냈을 때, 머리글도 써주셨네요. 저를 보고 E목사님의 '열매'라고 하셨어요. 어려운 환경에서 지금의 제가 되는 데는 E목사님의 공이 너무나 컸어요. 책에 사인을 해서 작은 선물과 함께 손 편지를 써서 드렸는데, 받으시고는 '축하금'이라고 쓴 봉투를 주셨지요.

  "정말 감사드려요. 사님의 사랑을 잊지 않을 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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