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이 하나님을 믿고 주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으려면 가장 먼저 자기 죄를 깨달아야 한다. 죄가 없는데 어찌 예수님이 짊어지신 대속의 십자가를 믿을 수 있겠는가?
처음 교회에 나가는 사람은 죄 같은 건 모르고 그저 복을 많이 받을 줄 안다. 그런데 다녀보면 알겠지만 갈수록 태산인 게 기독교 신앙이다. 기독교 신앙은 이 땅에서의 기복신앙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게 아니고 저 세상 바로 죽음 이후 천국에서의 삶에 중점이 가 있는 신앙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은 천국에서 받을 상을 바라보며 잘 감내해내야 한다. 특히 자기 죄를 보고 찾아내어 회개하고 주님 보혈로 깨끗하게 된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상급이 크다.
다른 모든 종교는 기복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유교는 자손들이 잘 되기 위해서 조상신을 잘 섬겨야 한다. 불교는 해탈의 경지를 추구하지만 윤회사상은 이 땅에서 잘하고 살아야 좋은 것으로 태어난다. 샤머니즘은 완전한 기복신앙이다. 이 땅에서 잘 되기만 하면 된다. 저 세상은 안중에 없다.
사무엘하서를 쓰고 읽으면서 다윗의 회개 부분을 따로 생각해 보는 데는 이유가 있다. 다윗은 한낱 양치는 소년이었으나 하나님께서 불러다가 온갖 훈련을 다 치르게 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는다. 그러면 무조건 감사하며 좋은 왕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단 한 번의 실수로 밧세바와의 간음죄에 빠진다. 거기다가 밧세바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는 자신의 간음죄를 숨기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일부러 죽게 만든다.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지른다. 한 나라의 왕인데 어찌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단 말인가!
그러나 예언자 나단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을 하자 곧 깨닫고 회개한다. 자신의 죄악으로 밧세바가 낳은 첫 번째 아이가 죽고, 집안에 자녀대에서 간음과 폭력이 끊이지 않을 것을 죄벌로 준다고 하는데, 달게 받아들인다.
회개란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죄를 깨닫고 인정하고 회개한다고 하지만, 똑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 몸이 따뜻해지지 않아서 아리따운 젊은 처녀 아비삭을 수종들게 하지만 동침하지 않는다.
시편 중에는 다윗의 시가 많은데 그중에서 참회시도 꽤 된다. 시편 51편은 다윗의 참회시 중에서도 잘 알려진 시이다. 현대어성경에서 몇 구절 찾아본다.
"제가 지은 죄 우슬초로 씻어주소서. 그리하면 제가 깨끗해지리이다. 이 몸을 닦아주소서. 그리하면 눈보다 더 희리이다." (시편 51: 7)
"하나님, 나에게 깨끗한 마음 지니게 하소서. 나의 속마음이 심지 굳게 하소서.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10)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제물은 찢어진 이 마음, 갈기갈기 찢어진 터진 이 마음뿐이오니 업신여기지 마소서." (시편 51:17)
다윗은 매 순간 자신의 죄를 씻어달라고, 깨끗하게, 새롭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그러했기에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를 용서하시고, 밧세바가 낳은 두 번째 아들 솔로몬을 왕의 후계자로 삼아주신다. 이것은 다윗의 회개를 받으신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를 상징한다.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하여 찬송시를 많이 짓는다. 시편 23편은 대표적인 감사시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그 무엇이 부족하리오." (시편 23:1)
"아, 그 누가 이렇듯 행복하리오. 이처럼 포근하리오. 주님의 손길 살아생전 끊이지 않으리니 이 목숨 살아 숨 쉴 동안에 주님의 전에 오래도록 살리이다." (시편 23:6)
참회시가 찬송시로 바뀌는 다윗의 삶, 우리도 그 같은 삶을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 어떠한 죄를 지었더라도 주님 십자가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주어지리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내 마음에 합한 자"라 명명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마음 흐뭇하시어 같은 말씀으로 응답해 주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