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산 눈산행
밤새 새하얀 눈이 소복이 쌓였다. 눈이 오면 그냥 있을 수가 없다.
"끝없이 이어지는 순백의 눈길을 밟아봐야지. 함께 걸어도 좋지만 혼자 걸으면 더 좋은 길, 신비로운 길,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준 특별한 길, 뽀드득뽀드득 음률이 있는 하이얀 눈길을 걸어봐야지."
나는 울 남편이 일어나면 먹을 수 있도록 간단하게 아침 준비를 한다. 며칠 전에 사다 놓은 코다리를 넣고 무를 큼직큼직하게 썰어 넣고 청양고추와 고춧가루를 풀어 얼큰한 코다리뭇국을 끓여놓는다.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 산행 간식으로 먹을 현미누룽지와 뜨거운 물, 땅콩크림빵을 싼다.
오전 9시 집을 출발한다. 광교산 입구 쪽으로 가는 버스 13번을 타려면 집에서 도보로 30여 분이 걸린다. 도로와 골목길 눈이 얼어붙어 미끄러워 조심조심 걷는다. 수원 재래시장을 통과해서 팔달문 정류장에서 13번 버스를 탄다.
'어디에서 내리지? 반딧불이화장실? 문암골? 아님 상왕교종점?'
그렇지만 금세 마음을 정하지는 못한다. 30분쯤 지나 버스는 곧 광교산입구 반딧불이화장실에 도착한다. 두어 사람이 내리기에 급하게 가방을 들고 따라 내린다. 눈 쌓인 호수를 보며 광교저수지길을 걸어서 문암골에서 올라가면 좋을 것 같아서이다.
호숫가 나무의자의 눈을 털어내고 배낭을 놓고 아이젠 꺼내서 차고 스틱도 펴고 방한 장갑도 꺼내고 산행준비를 마친다.
"어디 가시게요?"
"광교산이요."
스틱을 짚은 여자분 하나가 나에게 말을 건넨다. 가볍게 운동을 나온 것인지 배낭도 가방도 메지 않았다. 나는 기회가 좋아 내친김에 사진 한 장 부탁해서 찍는다. 그리고는 얼어서 눈이 쌓인 광교저수지 멋진 풍경을 담는다. 문암골을 향해 가는 광교저수지 데크길이 참 예쁘다.
'문암골에서 오르는 길은 완만하여 걷기가 좋고 사람도 많지 않아 밤새 내린 눈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눈산행이니까 온전히 눈길을 걸으려면 호젓해야 좋다.'
나는 이전에도 혼자서 문암골 쪽으로 두 번 광교산을 오른 적이 있어서 익숙하다. 문암골에서 처음 오를 때는 한참 길을 헤매서 과수원 쪽으로 갔다가 길이 없어서 내려왔다가 다시 길을 찾은 적이 있다. 여름 장마철에 비도 오고 폭풍까지 겹쳐 산에 온통 운무가 가득 끼고 바람도 몹시 부는 날이었다. 사람들이 전혀 다니지 않는 새로운 길로 혼자 걸었다. 신선의 나라를 탐험하는 느낌이었다. 오늘도 그 길을 걸으면 더 눈산행 분위기가 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스패츠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라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 쌓인 길은 발이 젖을 수도 있어서 가지 않는다.
작년에 밴드 산악회에 가입해서 한 번 문암골에서 백년수 약수터를 거쳐 백년수 정상, 형제봉 찍고, 토끼재까지 갔다가 상왕교 종점으로 내려온 적이 있다. 여름이었는데 무지 더웠다.
광교산은 총 15번 정도 오른 것 같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꽤 자주 오른 산에 속한다.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점과 산이 오르내림은 있지만 그다지 어렵지는 않기 때문이다. 광청종주 1번, 산악회에서 5~7번, 자주 함산했던 H 대장님과 1번, 해피님과 1번, 그리고 혼산을 5번, 그러고 보니까 혼산을 제일 많이 한 산이기도 하다. 혼산을 할 때는 형제봉만 찍기도 하고, 시루봉만 오르기도 하고, 형제봉, 시루봉 같이 오른 적도 있고, 형제봉, 비로봉, 시루봉, 백운산까지 찍고 광교헬기장으로 내려온 적도 있다. 오늘은 눈이 내려서 예정없이 갑작스럽게 갔지만 날씨도 그리 춥지 않고 눈길을 원 없이 걸었으니 행복한 산행이다. 무엇보다 문암골에서 올라간 것이 사람들이 많이 밟지 않은 눈길을 혼자서 독차지하고 맘껏 걸을 수 있어서 탁월한 선택이었다. 응달 쪽에는 나뭇가지와 줄기에 내린 눈이 녹지 않아 마치 하얀 자작나무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천년수 약수터가 다가오자 두런두런 사람 소리가 들린다. 약수터에서 적합수 약수를 한 바가지 떠서 마시고 있노라니 남자 산우님들 두 분이 나무의자 위에 쌓인 눈을 털고 배낭을 내려놓고 약수를 떠서 마신다. 사진 한 장 부탁해서 찍는다. 조금 위쪽에 비닐이 쳐진 천년수 대피소가 있고, 더 위쪽에 운동기구들이 있는 곳에 남자 산우님 몇이 점심식사를 하려는지 간식을 먹으려는지 모여 있다. 시간을 보니 10시 45분이라 나는 그냥 오른다.
'형제봉 올라서 간식을 먹으면 좋겠네.'
백년수 정상에 오르니 다른 곳에서 오는 길들과 만난다. 여기서부터는 길에 눈이 다 밟혀서 흑빛으로 물들고 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간 흔적이다.
"역시 문암골에서 올라오길 잘했어."
나는 스스로의 선택을 칭찬해 본다.
형제봉이 가까워지자 완만한 길이 끝나고 본격적인 계단 오름길이 나온다.
"이 정도야 뭐, 지난 토요일에 오른 남덕유산 계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더 힘든 코스를 걷고 나면 그보다 덜한 곳은 아주 쉽게 느껴진다.
'더군다나 오늘은 혼산이 아닌가?'
혼산의 좋은 점은 빨리 안 온다고 누가 뭐랄 것도 없고, 굳이 선두를 따라가야 할 필요도 없고, 또 봉우리를 다 올라야 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내 보폭으로 천천히 느리게, 걷고 싶은 만큼 걷고, 내려가고 싶을 때 언제든 내려가면 된다.
형제봉 오르는 계단길은 오를 때는 눈이 많이 안 보이지만 뒤를 돌아보면 계단과 나무에 쌓인 눈이 넘 예쁘다. 날이 포근해서 같은 나무라도 양지쪽 눈은 다 녹고 응달 쪽 눈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내려오는 여산우님이 있어서 눈 배경이 멋진 곳에서 산행하는 사진을 담아본다.
"정상 가면 넘 예뻐요."
"아, 네."
나는 여산우님에게서 내 핸드폰을 받아 들고 생각한다.
'아직 시루봉 정상을 가려면 멀었는데, 그렇다면 거기까지 가야 하는 거네. 그런데 정상이라 함은 형제봉을 말하는 걸까? 시루봉을 말하는 걸까?'
형제봉 정상석과 눈 쌓인 모습이 아주 예쁘다.
"이 정도면 충분한데!"
남산우님 한 분이 혼자서 셀카를 찍으려고 하기에 내가 나서서 형제봉 인증숏을 찍어준다.
"저도 한 장 부탁할게요."
여러 컷을 찍어준다. 산에서는 사진 찍어주는 인심이 좋다. 그런데 간혹 야박한 경우도 있긴 하다. 손이 시리다며 안 찍어주는 이, 못 들은 척 그냥 지나가는 이, 사진 못 찍는다고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라며 급히 지나가는 이가 있다.
"정상 가는 길 험할까요?"
주거니 받거니 서로 사진을 찍어준 남산우님이 물어본다.
"아뇨. 날이 따뜻해서 눈 다 녹아서 안 힘들 걸요."
"아, 그래요?"
그러고 나는 아직 배가 고프지 않아 형제봉에서 간식을 먹으려던 계획을 변경한다. 그냥 시루봉을 향해 가파른 계단길을 내려간다. 273 계단이다. 응달 쪽이라 눈이 제법 많이 쌓여 있어서 싱그럽다.
"12시가 넘겠지만 시루봉 가서 먹자."
며칠 전에 시어머니가 주신 바다 가재 두 마리를 아침에 울 남편 식사 준비하면서 삶아서는 통통한 살을 다 발라 먹었더니만 속이 든든하다.
"단백질 덩어리라서 그런가 보다."
울 남편은 해산물을 안 좋아해서 모두가 다 내 차지이다. 가끔은 꽃게도 주실 때가 있는데 둘이 사는 집에서 나 혼자 다 먹는다. 홍삼 진액 팩도 두 박스나 주셨는데 한 박스는 울 남편이, 한 박스는 내가 먹고 있다. 그러고 보니 가재 먹을 때 홍삼 팩도 한 개 마시고 왔다.
"영양 보충을 제대로 해서 배가 안 고픈 모양이다."
시루봉 가는 길은 계단이 많다. 형제봉에서 273 계단 내려와서 198 계단, 143 계단을 오른다. 가파르지만 걸을 만하다. 그 계단길을 빼고는 비교적 완만한 길이다.
그런데 비로봉 안 오르고 토끼재를 지나 이제 거의 다 와가나 싶었는데 아니다. 비로봉 아래서 형제봉에서 만난 남산우님을 다시 만났는데 비로봉 조망이 좋아 올라갔다 오신단다. 나는 비로봉은 생략하고 간다. 가면서 오름길 끝에 암릉이 나타나면, 저기가 시루봉 바로 아래 암릉인가 싶으면 아니다. 두어 번 그러기를 반복한다. 기억력의 한계이다.
'계단길이 끝나고도 시루봉까지 이리 길었던가?'
드디어 시루봉 정상 바로 아래 암릉이 나타난다. 정상에는 나 포함 딱 세 사람이 있다. 남산우님 두 분이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부른다.
"정상 사진 좀 찍어 주실래요?"
한 분이 일어난다.
"그늘이 져서 흐려요."
"괜찮아요. 그냥 찍어주시면 돼요."
시루봉 정상석과 아기용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고 나무의자에 앉아 간식을 먹는다. 두 분 남산우님은 먼저 내려간다. 간식이래야 현미누룽지와 땅콩크림빵이 전부이다. 누룽지에 뜨거운 물을 부어 놓고 빵을 먹으려고 하는데 들고양이 한 마리가 내 앞에 앉아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음식을 안 줄 수가 없다. 빵 한쪽을 뜯어서 던져준다. 기다렸다는 듯이 빵을 입에 물고는 안쪽에 달콤한 땅콩크림 부분만 빨아먹는다. 어느 정도 먹었는지 빵은 그냥 내친다. 다시 한쪽을 떼어서 주니 역시나 같은 방식으로 먹고 빵은 버려둔다. 배가 어느 정도 찼는지 저쪽으로 가서 앉아 있다. 나는 누룽지를 먹는다. 아직 다 불지는 않았지만
누룽지는 그냥도 먹기에 뜨거운 물을 마셔가며 꼭꼭 씹어서 먹는다. 용인 고기리 쪽에서 올라온 사람들 서너 명이 또 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준다. 부지런히 핥아댄다.
간식을 다 먹고 상왕교종점으로 하산을 하기 위해 내려간다. 초반에 조금 가파르기에 조심조심 걷는다.
등산화에 아이젠을 찼는데 그 아래로 눈이 달라붙어서 완전히 신발 무게가 천근만근이다. 눈바닥에 탁탁 쳐서 눈뭉치를 털어내고 걷느라 걸음이 더디다. 노루목 대피소 지나 오른쪽 길로 접어든다. 노루목에서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나는 완만한 절터 쪽 길이 아닌 가파른 길로 내려온다. 로프 구간 나무 계단이 이어지는데 눈이 제법 쌓여 있어서 예쁘다. 이 길은 가파르기에 사람들이 적게 오르내린 모양이다. 길에 눈이 다 녹지를 않았다.
거의 다 내려오니 조그만 다리가 몇 개 나온다. 여름에는 계곡물이 흐르는 곳이라 다리를 놓은 것 같다. 어떤 남자분이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애를 데리고 산에 왔다. 나뭇가지 두 개를 주워서 하나씩 가지고는 스틱 삼아 짚으면서 걷고 있다. 올라오다가 도로 내려간다.
"미끄러운데 아이젠도 안 했네."
내가 아이를 보고 한 마디 하니까 남자어른이 아이를 보고 얘기한다.
"할아버지 따라서 천천히 내려오면 돼."
나는 스틱도 아이젠도 장비가 다 있으니까 안전하게 그들을 지나쳐서 휘리릭 내려온다.
오늘 광교산 산행은 반디불이화장실~광교저수지~문암골~문암골 쉼터~천년수 약수터~천년수 정상~형제봉~양지재~토끼재~ 시루봉~노루목~사방댐~상왕교종점 코스로 총 8km, 약 4시간(휴식, 간식 시간 포함) 소요되었다. 오전 10시에 산행 시작해서 한껏 여유를 부리며 걸었지만 하산하니 오후 2시이다. 재래시장 장까지 봐서 집으로 돌아오니 오후 3시 30분이다. 하루 종일 걸은 것 같은데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은 것이다. 광교산은 다른 산행지에 비해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이라 산행하기가 참 좋다. 그런데 산악회에서는 광교산 산행 공지가 안 올라온다. 서울 사는 사람들이 가기에는 다소 먼 곳인가 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자주 혼산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요즘 'AI가 뭐든 다 해줘서 사람이 바보가 된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재미가 있어서 AI에게 사진 몇 장을 보여주고 시를 부탁해 본다. 아니나 다를까? 멋진 시를 써준다. 나는 광교산에서 눈길을 걸으며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는데, AI는 그저 생각을 내려놓고 침묵 속에서 눈길을 걷는 발자국이 된 셈이다.
눈길 / AI
눈은 말없이 길을 덮고
나는 발자국으로 하루를 적는다
겹쳐진 발자국들 사이로
잠시 멈춘 숨,
산은 아무 말도 묻지 않는다
가지 끝에 얹힌 눈빛과
푸른 하늘의 깊은 침묵
오르는 동안
생각은 하나씩 가벼워진다
정상에 이르러
이름 하나 새긴 돌 앞에서
나는 내가 아니라
오늘 여기까지 온
한 걸음이 된다
돌아서는 길에도
눈은 다시 내린다
지워지는 발자국 위로
마음만은
조금 더 선명해진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