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돌 때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 딱 한 장 있다. 너무 어려서 기억은 없지만 아마도 읍내 사진관에 가서 찍은 것 같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곱게 차려입었다. 하얀 한복이기는 하지만 깔끔하다. 나도 하얀 옷을 입었다. 머리털도 남자아이처럼 짧다. 어머니가 손수 지으신 옷을 우리 모두 차려입고 사진을 찍은 것 같다.
그 사진을 보면서 우리 집 마루 창호지를 바른 문과 벽을 그려보았다. 황토벽인데 황토색이 아닌 조금 더 멋진 색으로 칠해 보았다. 어머니 아버지 옷 색깔도 내 옷 색깔도 곱게 색을 입혀 보았다. 벽에는 부채를 그려 넣었다. 고풍스러운 느낌을 주기 위해서이다. 나는 조금 더 자란 모습으로 바꾸어 그렸다.
창호지 문을 열면 우리 안방의 가운데 미닫이 문이 있는 아래에 턱이 보이고(문은 늘 열려 있었다), 천장 가까운 위쪽으로 내 상장이 나란히 붙어 있다. 아버지는 내가 상을 받아오면 자랑삼아서 밖에서도 잘 보이는 그곳에 꼭 붙여두었다.
서울로 이사 올 때도 그 상장을 함에 보관해서 가지고 다녔다. 그런데 언제 상장들이 다 없어진 것인지 지금은 한 장도 가지고 있지 않다.
내 유년 시절, 그때가 나의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때가 아닌가 싶다. 할머니가 나를 9살 때까지 업고 다녔다는 걸 보면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나를 땅에 내려놓지 않고 키웠다는 얘기다. 맛있는 사탕, 홍시, 곶감, 엿 같은 것도 벽장에 숨겨 두었다가 살짝 주셨다.
사실 나는 시골에 살면서도 농사일을 별로 하지 않았다. 할머니랑 두 살 아래 여동생이랑 나랑 같이 콩밭을 수확하던 기억이 있다, 땡볕이 강한 때였는데, 쪼그리고 앉아서 콩밭 한 줄씩 맡아서 낫으로 콩대를 베어 가지고 그 자리에 눕혀놓고 앞으로 가는 것이었는데, 나는 한참 베다가 너무 힘들어서 콩대 위에 할머니가 벗어놓은 적삼을 얼굴에 덮고 낮잠을 잤다. 해가 뉘엿뉘엿 지면서 조금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일어나 보면 할머니와 여동생은 자기가 맡은 줄을 다 베고 내가 남겨둔 줄을 앞에서 뒤에서 베고 있었다.
여동생은 입이 댓 발이나 나와 있었지만 할머니는 나를 깨우지도 않고 일이 다 끝난 뒤에 집에 가자면서 나를 일으켰다.
일방적인 할머니의 편애 때문에 나는 여동생과 사이가 안 좋다. 여동생은 나를 엄청 미워한다. 무어든 나를 이기려고 한다. 그도 그럴 만하다. 여동생은 학업을 이어가지 못했는데, 나는 계속계속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집에서 돈을 안 주면 장학금을 받아가면서 아르바이트를 해가면서 공부를 했다.
그런데 여동생은 배우지 않았는 데도 아주 손재주가 뛰어나다. 바느질 솜씨가 좋아 옷이나 홈패션도 잘 만들고, 음식솜씨도 좋아 그 어느 유명한 한식집 요리보다도 더 잘 만든다.
동생의 솜씨는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것 같다. 우리 엄마 역시 배우지 않았는 데도 바느질도 요리도 아주 잘하신다. 그러니 평생 아버지, 할머니, 우리들 옷을 지어 입히시고, 식당을 차려 돈을 벌어 우리 5남매를 다 공부시키고 시집장가도 잘 보냈으니 말이다.
여동생은 결혼 전에는 회사에 다니다가 결혼하고는 수년 동안 집에서 홈패션을 부업으로 했다. 얼마 후에는 반찬가게를 차려서 돈을 많이 벌어 큰 평수의 아파트도 샀다. 우리 형제자매들 중에서 가장 잘 산다.
그런데 나는 공부는 잘했지만 솜씨가 보통이다. 아주 못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엄마나 여동생에 비하면 바느질도 음식 솜씨도 질적으로 아주 많이 떨어진다.
그래서 세상은 공평한 것 같다. 공부 많이 한 나보다 공부 적게 한 여동생이 더 잘하는 것도 많고, 또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옛 사진첩을 꺼내보면서,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나만 찍은 돌사진을 보면서, 함께 자란 형제자매들과 부모님을 생각한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공부만 계속하려고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부모님에게도 동생들에게도 말이다. 특히나 둘째 여동생에게는 언젠가 만나서 진심을 담아 사과의 말을 꼭 해야만 할 것 같다. 큰딸인 내가 해야 할 힘든 일을 둘째인 네가 하느라고 참 억울했겠다고 말이다. 아직은 준비가 덜 되어서 올 설에도 못 얘기하고 지나갔지만, 언젠가는 꼭 얘기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