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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여정 Oct 19. 2024

첫 발령

1984년 봄날

나는 대학을 서울에서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딸을 혼자 객지에 보낸다는 것은 부모님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자의 직업으로는 교사가 그래도 다른 직장보다는 인격적인 대우를 받는다며 아버지는 언니와 나에게 사대 진학을 권하셨다. 그래서 언니와 나는 사대를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우리 집 가정형편으로 서울에서 학교 다닌다는 것은 내가 매우 고생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언니와 내가 같이 대학을 다니고 내 밑으로 남동생이 두 명이나 있었으며 아버지는 아주 박봉의 교육공무원으로 어머니가 절약 절약하며 생활하신 기억이 난다.



말 잘 듣고 순한 나는 아버지의 권유대로 지방의 사범대학 수학교육과를 다녔다. 사범대학이라 등록금이 10만 원정도로 아주 저렴했다. 그 대신 졸업하면 5년의 의무 복무 기간이 있었다. 만일 지키지 못하면 혜택 받은 등록금을 토해 내야 한다. 졸업할 때만 해도 5년이란 긴 시간을 지킬 수 있을까? 했는데 나는 어쩌다 보니 벌써 40년이란 교직생활을 끝내고 올해 정년퇴직을 하였다. 정년퇴직을 하고 보니 내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첫 발령받았던 그 시절이 떠 올라 풋풋한 24살의 나를 만나 보고자 한다.  


   

대학 시절 방학 때 나는 언니랑 서울 삼촌 집에 놀러 와서 서울을 구경하였다. 광주에는 없는 전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면서 보는 바깥 풍경은 그 당시 내겐 큰 충격이었다. 마치 후진국 사람이 선진국의 신문물을 접하는 느낌이랄까? 시내 도로가 시원하게 넓고 건물도 다양하고 화려하며 명동의 백화점들은 나의 시선을 고정시키지 못했다. 현실적으로 너무 좋았던 것은 동대문의 옷값이 너무나 싸서 우리는 보따리 장사처럼 옷을 잔뜩 사가지고 가서 멋을 부렸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좋은 서울의 기억으로 나는 졸업하면 서울에서 살고 싶었다. 그래서 전라도에 발령받지 않고 서울에 발령받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졸업할 당시 서울은 티오가 없었고 경기도는 티오가 있어서 희망하면 경기도에 발령받을 수 있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경기도를 희망했다. 당연히 부모님은 매우 놀라시고 걱정하셨지만 결국은 나의 의견을 존중해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당돌하고 겁이 없는 나였다. 지금까지 살아온 바운더리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경기도! 경기도를 전혀 모르면서 단지 서울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선택한 곳이다.  


   

드디어 1984년 3월 1일 경기도 이천에 있는 면소재지의 작은 중학교로 발령이 났다. 광주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 반포 고속터미널까지 온 후에 거기서 이천 가는 버스로 환승한다. 이천읍에 도착하면 우리 학교 가는 버스를 타야 하는데 배차 간격이 50분에 1대이며 도로는 흙먼지를 날리는 비포장도로였다. 시간이 안 맞으면 50분을 마냥 기다려야 한다. 우리 학교는 마을과 떨어져 있으며 버스에서 내리면 학교 입구까지 약 200m 정도 가야 한다. 학교까지 가는 진입로 길 왼쪽에는 논이 있으며 오른쪽 나지막한 산등성이는 공동묘지이다. 논에 일하는 사람이 없으면 대낮에도 걸어가기가 살짝 무섭다. 그 이유는 행정실 여직원이 토요일(그때는 토요일 근무가 있었음) 혼자 퇴근하다 이상한 사람에게 귀를 물렸다는 이야기를 듣고부터 우리는 겁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학교 안에서 매점을 하는 아저씨네 집에 방을 얻어 자취를 하였다. 나와 같이 신규 발령을 받은 교사와 3년 차 교사 이렇게 네 사람이 방 하나씩을 얻어서 살았다. 우리는 토요일에 이천 설봉 온천으로 목욕을 가거나 서울 갈 때 같이 다녔다.  토요일 학교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으면 지나가는 승용차들이 우리를 태워 주었다. 우리를 이천읍에서 내려 주면 되는데 본인도 서울 가는 길이라며 서울까지 태워 주신 분도 있었다. 요즘 같은 세상이면 서로에게 있을 수 없는 상황이나 그때는 참 따뜻하고 믿을만한 세상이었나 보다. 


 

나는 언니가 삼촌 집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라 토요일에 서울 가서 언니랑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서울 한번 가면 고생이었다. 일요일을 서울서 보내고 월요일 새벽에 삼촌 집을 출발하여 반포터미널에서 이천 가는 버스를 타고, 이천에서 50분 간격으로 있는 학교 가는 버스를 제시간에 타기 위해 버둥거리면서도 주말에 일직(일요일에 학교 근무)이 안 걸리면 서울에 가서 고궁을 비롯하여 여기저기 구경하며 일주일간의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때는 비포장도로를 40~50분 타고 갔던 곳이 몇 년 전에 가보니 길이 너무 잘 나 있어 학교까지 얼마 안 걸렸다. 학교 주변도 놀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많은 세월이 흘렀으니 당연히 주변 환경이 많이 변하였는데 내가 근무한 학교는 여전하였으며 학급수는 더 줄었다. 아무래도 농촌의 인구수가 줄고 있으니 학교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내가 발령받았을 당시 우리 학교는 면 소재지의 전 학년이 8학급인 아주 작은 시골 학교였다. 근데 나보다 10일 늦게 3월 10일 자로 발령받은 동기들은 수원시로 발령이 났다. 성적순으로 순서대로 발령이 나는데 나도 10일 늦게 수원시로 발령받고 싶었다. 뭔가 억울하고 답답하였다. 이 시골에서는 평일에 문화생활을 전혀 할 수 없고 학교에 갇혀 있어야 했기에 더욱 도시의 학교생활이 그리웠다. 학교가 작아 교사수가 적으니 일직도 자주 돌아와 주말에 학교에 있는 날이 많았다. 학교가 마을과 동떨어져 있으니 혼자 나가기도 무섭고 그냥 학교와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나는 1,2,3학년 수학 교과에 상치교과로 2학년 도덕을 가르쳤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그때는 상치교사가 많았다. 교감선생님은 한문을 가르치셨다. 우리 교무실 가운데는 나무 땔감의 난로가 설치되어 있으며 전화기는 교감선생님 책상 위에 딱 한 대가 있었다. 모든 전화는 교감선생님이 받아서 바꿔 준다. 근데 이 전화를 우리가 사용할 때는 전화기에 나와 있는 손잡이를 돌려서 교환에게 전화번호를 말하고 연결되기를 기다린 후 통화가 이루어졌다. 사적인 통화도 모두가 들을 수밖에 없는 교무실 환경이다. 40년 전인데 마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 같다. 


     

시골의 조그만 학교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봄이면 학교 앞 저수지 둘레로 노란 개나리와 연초록의 수양버들이 살랑살랑 흐늘거렸던 모습, 학교 진입로 오른쪽 동산에 진달래와 개나리 그리고 이름 모를 작은 꽃들, 나무, 그리고 벤치들이 생각난다.    

여름이면 시골의 햇빛은 유난히 강한 듯 내리쬐는 햇살이 따가 왔던 기억, 수업 중에 솔솔 풍기는 재래식 화장실의 암모니아 냄새(정말 냄새가 강했다), 그런데 교실에 선풍기는 있었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을이면 시골이 그렇듯 학교 주변 나무들의 단풍이 예뻤다. 추수가 끝나면 우리 반 아이들이 쌀도 가져다주고 사과도 가져다주었다. 쌀밥이 너무 맛있어서 반찬 없이 밥만 먹을 때도 있었다. 임금님께 진상한 이천 쌀이 유명한 이유이다. 사과는 반으로 쪼개면 꿀이 선명하게 나타나는 꿀사과로 참 맛있게 먹었다. 

겨울이면 이천은 분지 지역이라 눈도 많고 추웠다. 쉬는 시간이면 교무실 난로가에 모여서 손을 비비며 녹였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연탄불로 음식도 하고 방의 난방도 하였다. 



어느 겨울날 자는데 너무 추워서 깼다. 자기 전에 연탄불을 갈았기 때문에 죽었을 리는 없는데 하며 부엌으로 가서 연탄아궁이를 보았다. 아궁이에 연탄이 없고 텅 비어 있었다. 옆방 선생님의 아궁이와 내 아궁이가 마주 보고 있으면서 같이 부엌을 쓰고 있었는데 평소에 연탄불을 잘 죽이는 옆방선생님의 아궁이에 연탄불이 활활 잘 타고 있었다. 뭔가 촉이 와서 물어보니 자기가 너무 추워서 가져갔다고 한다. 또 한 번은 일요일에 일직이라 나는 서울을 못 가고 있었는데 밤에 트럭이 마당으로 들어오더니 옆방 선생님이 팔짝하고 조수석에서 내렸다. 나는 이 밤에 무슨 일인가 하고 의아해했는데 토요일에 집을 가지 않고 서울에서 놀다 일요일에 막차로 이천에 왔는데 택시비가 없다 보니 오디오를 사서 트럭을 타고 왔다고 한다.



이렇게 엉뚱하고 자유분방한 선생님덕에 나의 고정관념은 늘 새로운 상황을 소화하기 바빴다. 그날밤 오디오 개시로 선생님 방에서 들었던 김정수의 '내 마음 당신 곁으로'는 들을 때마다 그때를 회상시켜 준다. 늘 밝고 깔깔거리며 거리낌 없는 솔직한 성격으로 잘 지냈던 그 선생님은 정년을 채웠을까? 궁금하다.



나는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고 나의 교수법에 자신이 있었다. 1학기가 끝날 무렵 자체 제작으로 학교에서 시키지도 않은 강의 평가를 실시하였다.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를 기대하며 학생들의 설문지를 읽는 동안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아니 이럴 수가!


학생들은 선생님 설명이 너무 빠르고 전라도 사투리 때문에 무슨 말인지 이해가 도통 안 됐다고 한다.

아니 그럼 수업 중에 진작 얘기를 하지~~~~~ㅠㅠ

나는 그날 이후로 전라도 사투리를 쓰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가 전라도 사람인 줄 말 안 하면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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