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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미여정 Oct 20. 2024

나의 어린 시절

여수에서의 추억

나는 여수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여수에서 다녔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은 일본식 집으로 천장과 지붕 사이에 아주 낮은 쓸모없는 공간이 있었는데 쥐들이 달리기 시합을 하는지 밤마다 시끄러웠다. 그때는 집집마다 수도가 없던 시절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우리 집은 옆집 담의 구멍을 통해 호수로 물탱크에 물을 받아썼다. 


     

우리 집 대문 앞집은 여수 중앙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집인데 전화도 있고 TV도 있는 부잣집이었다. 사람들이 그 집 마당에 모여 앉아 TV를 보기도 하였다. 나도 우연한 기회에  가수가 꽃밭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보았는데 너무나 예쁘고 노래도 잘하였다. 얼마나 인상깊이 봤는지 그 가수가 잊히질 않았다. 그 가수는 ‘정훈희’였다. 나는 TV에서 본 가수 흉내를 내며 나만의 무대에서 쇼를 하며 즐겁게 놀았다. 우리 집 작은 마당 끝에는 담이 있고 담 위에는 작은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나는 화분을 치우고 담 위의 좁은 공간을 나의 무대로 여기고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가수 흉내를 냈다. 지금 생각하면 참 겁이 없었다. 우리 집이 길보다 높은 위치여서 마당에서 보는 담은 높지 않지만 바깥 길에서는 높았는데 떨어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지금 생각하니 초등학교 시절에 나랑 친한 친구는 아버지가 안과 의사였고 부자였다. 우리는 놀다가 친구 부모님이 계시는 안방에서 같이 TV 연속극을 보기도 하였다. 지금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집에 없는 TV를 보는 것은 너무나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또 한 친구는 아침에 등교를 같이 하는데 내가 친구집에서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은 친구에게 짜증이 나야 하건만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TV 아침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을 보느라 짜증이 날 새가 없었다. 난 어렸을 때 TV가 참 신기했었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감선생님이셨다. 박봉의 월급으로 어머니는 우리 4남매를 키우시면서 아버지가 장남이셔서 시골에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 경제적인 모든 부분을 감당하셔야 했다. 어려운 형편으로 아버지는 단벌신사이셨다. 그래서 일요일에 나는 세탁소하는 이모부에게 아버지 양복을 깨끗이 다려 오는 심부름을 했다. 아버지는 봉급날이면 늘 거나하게 술을 드시고 오셔서 우리를 모두 불러 모으셨다. 그리고 양복에서 월급봉투를 꺼내어 우리 4남매에게 용돈을 두둑이 주셨다. 처음에 우리는 너무나 좋아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주무시면 어머니는 우리에게 있는 돈을 모두 걷어서 봉투에 다시 넣으셨다. 이후로는 아버지 봉급날의 이벤트가 우리에겐 그냥 하나의 과정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버지가 술을 많이 드신 다음날 아침은 내가 출동하는 날이다. 노란 작은 냄비를 들고 아버지가 좋아하신 깨죽을 사러 골목길을 열심히 뛰어갔다. 


    

우리 어머니는 참 지혜로우신 분이셨다. 

우리 집 옆 골목에는 작은 구멍가게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 구멍가게를 너무나 좋아했다. 맛있는 과자들이 늘 우리를 유혹하였다. 어머니가 10원을 주시면 5원어치 사 먹고 아껴 두었다 나중에 또 5원을 썼다. 어머니는 우리들이 구멍가게에 갔다 바치는 돈을 아낄 묘안을 생각해 내셨다. 도매시장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과자를 사 오셔서 우리에게 가게 놀이를 시키셨다. 내가 가게 주인이며 동생들이 손님이다. 며칠에 걸쳐 과자들이 완판 되면 나에게 들어온 돈으로 어머니는 또 과자를 사 오셨다. 언니는 기억에 없는 걸 보니 중학생이라 우리랑 놀지 않은 것 같다. 우리가 특히 좋아했던 과자는 ‘또 뽑기’ 캐러멜이었다. 각자 고른 캐러멜에 ‘또’라는 글자가 나오기를 얼마나 기대하며 뽑았는지, 지금 생각하니 그 모습들이 마냥 귀엽게 떠오른다. 



그리고 어머니는 우리 간식으로 매일 빵과 전지분유를 끓여 주셨다. 반죽한 밀가루를 네모난 틀 2개에 부어 노란 솥에 담아서 빵을 익혀 주셨다. 요즘의 파운드케이크 같은 것인데 지금처럼 달고 부드럽지 않은 겉바속촉의 겉이 바삭바삭한 너무나 맛있는 빵이었다. 빵과 함께 회색주전자(우유 끓이는 전용 주전자)에서 나온 따뜻한 우유는 정말 맛있었다. 어려운 형편에 맛있는 빵을 사줄 수 없으니 어머니가 매일 손수 만들어 주셨던 것 같다. 성장기에 어머니의 정성이 담긴 빵과 우유 덕분에 우리 4남매는 키도 크고 건강하게 잘 자란 것 같다.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관사가 있는 학교로 발령을 받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운동장 한쪽 끝에 있는 관사에서 살았다. 대문을 열면 운동장이 쫘~악 나타나 학교 운동장이 우리 집 마당 같았다. 아침마다 아버지는 운동장에 있는 비둘기에게 ‘구구구’하면서 모이를 주셨다. 며칠 지나지 않아 ‘구구구’ 소리만 하면 비둘기들이 떼로 모여들었다. 여수는 겨울에 눈이 오지 않는 대신에 바람이 많이 불었다. 바람은 항상 운동장 끝에 있는 우리 집 쪽으로 불어와 흙먼지가 많이 날렸다. 화장실은 운동장 쪽과 우리 집 화장실이 붙어 있어서 밤에 화장실 가기가 너무나 무서웠다. 


    

나는 3년 터울인 언니의 교복을 물려받아 입고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월요일 아침에 교문을 통과할 때마다 너무나 긴장되고 무서웠다. 학생과 선생님 5~6분이 교문에 서서 두발길이, 교복카라, 명찰 등 용의 검사를 철저히 하셨다. 일요일 오후면 어머니는 미용사가 되신다. 나는 다우다천의 노란색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머리를 어머니께 맡긴다. 규정은 귀밑 2cm였으나 난 항상 귀와 똑같은 길이로 잘라 달라고 하여 안전하게 교문을 통과하였다. 


    

우리 학교는 공립이었는데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 교장선생님 이하 모든 선생님이 학교 오면 학생들처럼 똑같이 제복으로 갈아입으셨다. 남녀 모두 밤색인데 남교사는 공장장 복식이고 여교사는 발목까지 오는 긴치마에 짧은 재킷을 입으셨다. 임신한 여선생님이 계셨는데 상의가 짧으니 배가 도드라져 보이고 불편해 보여 안쓰러웠다. 요즘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당시 우리 학교는 3층 건물에 화장실은 교실 건물과 떨어져 1층에 따로 있었다. 물론 푸세식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우리는 쉬는 시간 10분 동안 3층에서 1층 화장실을 다녀와야 했다. 복도는 나무 바닥인데 양쪽에 노란색으로 한 줄씩 그어 놓고 그 줄만 밟고 미스코리아처럼 얌전히 일자로 걸으면서 좌측통행을 해야 했다. 이 규칙을 어기다 걸리면 엄청 혼이 나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화장실이 급해도 노란색 줄을 벗어나거나 뛰면 안 되었다. 거기다 복도는 반질반질 아주 미끄러웠다. 우리는 청소시간에 호텔 메이드 복장처럼 하얀색 머리스카프와 에이프런을 입었다. 그리고 교실과 복도에 줄 맞춰 앉아서 왁스를 손걸레에 묻혀가며 바닥을 열심히 닦았다. 그래서 바닥이 윤이 반짝반짝 나고 미끄러웠다. 그때는 실내화도 없이 양말로 다녔던 시절이다.       


세상이 너무 바뀌어 요즘과 대비되는 이야기들만 생각난다. 

그 당시 우리는 별 말없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순응하며 잘 따랐다. 요즘 학생들이 상상할 수 없는 많은 규제와 통제를 일방적으로 받았지만 반항도 비판도 없이 학창 시절을 보낸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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