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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이공키로미터 Dec 28. 2021

Vinyard

#1

우리

가족이

 

록키산맥 여행의

막바지에

 

밴쿠버로 향하는

길이었다.

와이너리로 유명한 작은 도시가 우리의 마지막 여행지였다. 난 평소 와이너리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포도나무가 가득한 농장에서 잘 익은 와인을 마시는 기분이 어떨지 항상 궁금했었다. 마침내 고대하던 와이너리에 도착해서 이런저런 와인을 테이스팅 하며 나와 아내는 ‘역시 낮술이 최고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바로 그때 아들 녀석이 말했다. “아빠. 저쪽에 라면가게가 있어. 이리 와서 봐봐.” 난 설마 하면서 아이를 따라 와이너리 한구석으로 향했다. 와이너리 외곽 한편에 자그마한 푸드트럭이 한대 있었고, 붉은 깃발에 “라멘"이란 일본어가 선명했다.

난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가까이 가보았다. “이라샤이마세" 우렁찬 일본인의 목소리가 푸드트럭 안에서 울려 퍼졌다. 요리사로 보이는 일본인 남자와 주문을 받는 서양인 여자가 안에 있었다. 푸드트럭 앞에는 그들의 딸인 듯싶은 소녀가 혼자 무언가를 하면서 놀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와이너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푸드트럭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때마침 출출하기도 하고 호기심에 넘쳐 난 라멘을 주문했다. 일본인 요리사는 열과 성을 다해 음식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주문을 받자마자 면을 뽑고, 정성을 기울여 라멘을 만드는 것을 밖에서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조리하는 동작은 섬세하고 신중했고, 트럭 안에서 마치 악기를 연주하는 듯 보였다. 맛은 굉장했다. 진한 육수와 탄력 있는 면발은 흡사 도쿄에서 먹었던 라멘과 똑같았다. 아니 그보다 나았다. 테이스팅 중인 와인과 먹으니 그 맛은 훨씬 더 나았다. 진한 육수와 새콤한 와인은 정말 잘 어울렸다. 와인을 마시며 허겁지겁 라멘을 국물까지 깨끗이 비웠다. 아내도 아이들도 모두 만족한 표정이었다.

바로 그때 라멘 가게 주인의 딸이 왠지 우리 아이들과 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둘째와 나이가 엇비슷해 보였다.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서였는지 딸아이는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나는 서진이에게 아이와 놀라고 권했고, 녀석은 거리낌 없이 그 아이와 와인 밭을 뛰어다니며 놀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즐겁게 같이 노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라멘집 일본인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해는 어느새 기울기 시작했고, 장사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는지 그 일본인도 와인을 한잔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왜 그가 이 록키산맥 깊숙이 라멘 가게를 차리게 되었는지를 말이다.


#2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두운 밤, 넓고 깊은 호수 옆 작은 모텔 안이다. 커리 마살라와 갈릭난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오카나칸 밸리 와인으로 입가심을 했다. 스피커에선 스티비 원더의 노래가 흐르고, 작은 모텔방은 신비로운 공간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나는 잠시 전지전능한 신이 된다. 쓰고 있던 단편소설 속 일본인 요리사는 배를 타고 전 세계를 누비는 선원이 되었다가 험한 산을 오르는 산악가가 되기도 한다. 보라색 스티커로 장식된 멋진 자전거를 타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 달빛이 비치는 숲 속 길을 달리기도 하고, 인적이 드문 태국의 한 섬에서 옷을 홀딱 벗고 스노클링을 즐기기도 한다. 참 사랑하는 사람이 빠지면 안 되지. 사랑에 빠진 여자는 캐나다인이었다가 일본인이었다가 캐나다에 어학연수를 온 한국인이 되기도 한다. 그녀의 몸은 어찌나 뜨겁던지 함께 자고 일어난 자리는 언제나 축축이 젖어 있었다. 사랑의 결실로 얻은 아이는 남자아이였다가 여자아이가 되기도 하고, 쌍둥이 남매가 되기도 한다.

음악 소리가 컸는지 침대에서 자고 있던 아이와 아내가 잠시 뒤척인다. 난 음악소리를 좀 더 줄이고, 와인을 한잔 다시 따른다. 여행의 마지막 날, 난 이 시간을 좀 더 즐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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