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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이공키로미터 Jan 08. 2022

만화가게 주인의 행복한 하루

이 글은 몇 년 전 애정 하던 "망원만방"이 폐업한다는 소식을 듣고 쓴 글입니다.


목요일이다. 가장 손님이 뜸한 요일이다. 손님이 없기에 그간 밀렸던 일을 하기 딱 적당한 날이다. 오래간만에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을 차려 먹었다. 그래 봐야 김치볶음과 달걀찜이었으나 평소 빵부스러기를 허겁지겁 먹었던 것에 비하면 제대로 차려 먹었다. 가게를 낼 때 빌린 대출금을 상환하기 위해 은행에 들렸다. 가게에서 소소하게 파는 과자와 음료, 라면 따위를 사기 위해 마트로 향했다. 카트가 가득 차도록 쇼핑을 하고, 가게로 돌아왔다. 가게 문을 열자 밤새 가라앉아 있던 먼지가 안개처럼 올라오고, 잠자고 있던 책의 향기가 코에 훅 들어온다. 이 향기가, 난 너무도 좋다.



10여 년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다고 하자 집사람은 펄쩍 뛰었다. 아직 아이들은 어리고, 지금 직장은 연봉이 높지는 않았지만 별다른 사고만 치지 않으면 오래 다닐 수 있는 곳이었다. 집사람에게 한참 이유를 설명했으나 내 진심을 전하기는 요원해 보였다. 어렵게 어렵게 설득을 해 지금 이곳을 열었다. 내가 평소 애정을 가지고 읽었던 만화책을 도매상에서 구매하고, 중고 가구점을 뒤져 책을 읽기 좋은 의자와 테이블을 골랐다. 가게 자리를 구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길가에 행인이 많이 다니는 곳은 임대료가 너무 높았다. 수십 곳의 부동산을 다닌 끝에 이곳을 찾아냈다. 가게터는 상가 구역이 아닌 주택가 초입에 있었다. 근처에 커피솝과 몇 군데의 식당이 있었고, 행인이 많지는 않았지만 가까운 곳에 버스정류장이 있어 그렇게 휑하지는 않았다. 그래 내가 엄선한 만화책과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면 구석에 있어도 사람들이 찾겠지란 순진한 생각으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개장 후 몇 달은 말 그대로 파리만 날렸다. 별다른 홍보를 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타겟으로 잡은 학생들이 학교를 마치면 죄다 학원으로 가는 탓에 텅 빈 만화가게를 홀로 지키는 날이 반복됐다. 게다가 임대료는 내는 날은 어찌나 빨리 오던지. 무언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학생이 오지 않으니 새로운 고객을 찾으려고 고민에 고민을 했다. 만화책을 좋아하는 고객이 누굴까. 학생은 아니다. 학생들은 핸드폰과 게임에 빠져 더 이상 만화책을 읽지 않은지 오래다. 아 이 사실을 너무나 늦게 깨달았다. 그럼 회사원은 어떨까. 어릴 때 만화책 한 권을 아끼고 아껴읽던 중년의 회사원을 공략하는 건 어떨까. 가만히 직장 다닐 때를 생각해보자. 그때 가장 큰 낙은 집사람 몰래 오후 반차를 내고, 만화가게에 가서 라면 먹으며 만화를 보던 것이었다. 그래 직장인을 타겟으로 하자. 난 가게를 학생 위주가 아닌 직장인 위주로 바꾸었다. 만화책도 허영만이나 이현세처럼 80~90년대 작가의 것으로 바꾸고, 담배를 필수 있는 환기가 잘되는 흡연실을 갖추고, 예전 오락실에 있던 코인을 넣는 아케이드 게임기를 어렵게 구해 설치했다. 근처 회사에 전단을 만들어 뿌리기도 했다.

“반차 쓰고 오시면 입장료를 50% 할인해 드립니다. 아이와 오시면 아이는 무료!”

효과는 좋았다. 갈 곳 없는 직장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손님이 늘어 자금의 여유가 생기자  난 최고급 안마의자도 설치하고, 양복과 셔츠의 주름을 펴주는 스타일러도 설치했다. 성인용 만화책도 늘렸다. 손님은 점점 늘었고, 이제는 알바생을 쓸 정도까지 됐다.

가게 창문을 활짝 열고, 구석의 LP 플레이어에 팻메쓰니의 앨범을 올렸다. 잔잔한 기타 선율이 흐르고, 난 가게에서 가장 편안한 소파에 앉아 새로 구한 나가이고의 만화책을 펴 들었다. 첫 손님이 오기까지 천천히 그림을 음미하며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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