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가장 서울다운 곳을 뽑자면 바로 종로가 아닐까. 광화문에서 시작해 동대문에서 끝나는 대로와 그 뒤편에 실핏줄처럼 이어진 골목들은 서울의 과거와 현재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어느 곳보다 즐길거리, 먹을거리가 풍성하다.
종로의 시작은 광화문에 들어서기 전 정동에서 시작하는 것이 적절하다. 가을에 특히나 아름다운 정동길을 지나면 광화문에 들어선다. 광화문은 서울의 상징으로 손색없는 곳. 광화문 광장은 부패한 정치인들에게는 껄끄러운 곳일지 모르지만 시민들에게는 편안한 휴식처이자 심판장이다. 광장에서 바라본 경복궁과 북한산은 언제 봐도 든든하고, 이곳을 시작으로 많은 볼거리와 먹거리가 펼쳐지기에 마음은 벌써 들뜨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들려야 하는 곳은 "교보문고". 독서와는 거리가 먼 아버지가 자식의 어린이날 선물로 책을 사주기 위해 수고스럽게 멀리서 찾아온 곳, 그 아이가 자라 그의 자녀들에게 읽어줄 동화책을 사러 온 곳이다. 오랜 시간 같은 자리에서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고, 책읽기의 즐거움을 알게 해 준 소중한 곳이다.
머리를 채웠으니 이제 배를 채울 차례다. 종로 1가 뒷골목에 넓게 자리 잡고 있던 피맛골의 음식점들이 높게 솟아오른 빌딩으로 수직 이동했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곳은 이름만 언급해도 입안에 침이 흥건히 고이는 "서린낙지". 베이컨, 김치, 감자, 콩나물, 낙지라는 위대한 조합은 밥 두 공기와 소주 한 병을 금세 비운다. 아쉬운 건 어릴 때는 가격이 부담돼서 잘 못 갔는데, 이제는 사람이 너무 붐벼서 가기 어려운 곳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배를 채운다음 술 한잔 하기 딱 좋은 곳이 바로 옆에 있다. 꼬치와 꼬막으로 술 한잔 하기 좋은 "육미". 화재로 이사 가기 전 육미는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왁자지껄한 분위기의 술집이었다. 지금은 많이 차분해졌는데 그전에는 크기도 컸고, 저렴하고 맛 좋은 안주 탓에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끊이지 않던 곳이었다.
배도 부르고, 술도 한잔 했으니 이제는 분위기 있는 곳에서 음악을 즐겨보자. 종로 2가 영어학원이 즐비한 골목 초입에 자리 잡은 "오존". 오존은 기가 막힌 선곡에다가 적당히 어둡고 흥겨운 분위기의 펍으로 대학시절부터 자주 들렸던 곳이다. 직장을 다니고, 아이를 키우며 그곳에 가는 일이 뜸해졌지만 종로 1가에서 2가로 넘어갈 때쯤이면 난 오존이 아직 잘 있는지 늘 신경이 쓰였다. 그곳에서 음악을 즐기며, 담배를 한 갑씩 피우면서 밤새워 친구들과 좋은 추억을 만들던 곳이기에 난 그곳이 오래 남아있기를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오존이 문을 닫았다. 난 굳게 닫힌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어쩔 줄 몰라했다.(다행히 근처에 오존과 상당한 비슷한 분위기의 "라커스"라는 곳을 우연히 발견해 이제는 이곳을 아지트로 삼고 있다.)
이제 종로 3가다. 이곳에는 큰 극장이 많았다. 멀티플렉스 영화관 이전에 개봉 영화는 반드시 이곳에 와야 볼 수 있었다. 서울극장, 단성사, 피카디리, 대한극장이 근처에 포진해 있었고, 명절이나 대작 영화가 개봉하는 날이면 거리는 긴 행렬로 들썩였고, 오징어 굽는 냄새가 자욱했다. 기억나는 영화가 몇 편이 있다. 고등학교 때 중간고사를 마치고, 친구들과 서울극장에서 본 터미네이터2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대한극장에서는 커다란 스크린으로 사운드트랙이 인상적이었던 마지막 황제를, 피카디리에서는 장국영의 금지옥엽이란 홍콩영화를 재미있게 봤었다.
종묘 앞부터는 음산한 기운이 흐르는데 성인 비디오와 잡지의 성지였던 세운상가 때문이다. 온갖 전자제품을 파는 1층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어른이 되고 싶은 중고딩을 위한 신세계가 펼쳐진다. 상당해 불량해 보이는 주인아저씨가 지나가는 나에게 좋은 거 있다고 슬쩍 말하고, 난 자석에 이끌리듯 두리번거리며 상점 안에 들어간다. 뭐가 들었는지 상상만 해도 설레던 비디오테이프와 잡지를 몰래 사들고, 집으로 갈 때 어찌나 심장이 쿵쾅거리던지...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고, 그 당시를 대표하던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종로. 시네코아, 허리우드 극장, 뮤직랜드, 인사동, 탑항공사, 종묘 앞의 잔술집, 보령약국, 광장시장, 헌책방 거리, 동대문 시장 등 아직 갈 곳이 널려 있지만, 배도 부르고, 다리도 아프고, 손가락도 아프고, 오늘 종로 탐방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