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스팅스 빌딩, 3층

by 삼이공키로미터

책 읽기도 시들해지고, 가면놀이에도 싫증이 나면서, 난 헤이스팅스 빌딩을 멀리하게 되었다. 갑자기 하던 일이 바뀌는 바람에 바쁘기도 했고, 무엇보다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회사에서 어느 날 주위를 돌아보니 나는 부서에서 가장 나이 많은 직원이 되어 있었다. 팀장도 담당도 나보나 훨씬 어렸다. 점심 식사 후 커피를 마시며, 내가 어릴 적 짜장면 가격이 500원이라고 했더니 동료들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차, 이 말은 하는 게 아니었다. 암튼 이 날 저녁 내 기억이 맞는지 시골에 계시는 아버지께 전화로 물어봤는데, 아버지도 그 당시 짜장면 가격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셨다. 하지만, 난 어릴 적 먹었던 중국집, 동해원 이름과 짜장면에 들어있던 큼직한 돼지고기의 고소함까지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말이다.


새로 바뀐 업무에 적응하지 못하고, 늦게까지 야근을 하던 어느 날 금요일이었다. 젊은 친구들은 금요일 밤을 즐기러 이미 퇴근을 했고, 조용한 사무실은 에어컨이 나오지 않아 후덥지근했다. 서둘러 짐을 챙긴 나의 발걸음은 후암동 언덕길로 향했다.


빌딩 문을 열기까지는 매번 꽤 용기가 필요하다. 이 문을 열고 저곳에 들어가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 아닐까. 아내와 두 아이를 가진 가장이 이런 곳에 오는 것이 맞을까. 혹시 나중에 가족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특별히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안 하고 후회하느니 하는 것이 나을 거라 스스로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문을 열자 스탠리가 반겨준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네, 그렇게 됐네요. 참, 전 아직 3층은 못 가는 거죠?


“잠시만요.”


스탠리는 태블릿을 잠시 보더니 방문 횟수가 충분해서 오늘부터 3층 출입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럴 리가. 난 이곳에 그다지 많이 오지 않았는데. 한 달에 한두 번, 많으면 한주에 한번 정도밖에 오지 않았었는데. 이 정도면 충분했던 걸까?


3층은 사우나였다. 락커룸에서 가서 옷을 벗고, 간단히 샤워를 하고, 사우나로 향했다. 여러 곳의 사우나룸이 있었고, 각 방에는 이름이 있었다. 코사무이, 재패니즈 가든, NO.5 오렌지, 불독, 보니따. 난 코사무이로 들어갔다. 방은 커다란 돌로 만들어져 있었고, 수증기가 가득해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디선가 잔잔한 음악이 들렸고, 은은한 열대의 진한 꽃향기가 났다. 난 나무 의자에 느긋이 앉아 눈을 감았다. 바로 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라. 이건 뭔 상황. 여자들 두 명이다. 화들짝 놀란 나는 주섬주섬 타올로 몸을 가렸지만, 여자들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사우나 구석의 달궈진 돌무더기에 나무 주걱으로 물을 뿌리며, 한가하고 익숙하게 사우나를 즐겼다. 그녀들의 몸은 군더더기가 없고, 아주 아름다운 곡선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시선을 도저히 그녀들을 비껴갈 수 없었다.


마침 입구 반대편에 작은 문이 하나 보였다. 이곳에 더 있고 싶었지만 더 있다가는 난처한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난 작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문을 열자 상상도 못 했던 광경이 펼쳐졌다. 시원한 계곡물이 흐르는 시냇가였다. 주변에 열대꽃이 화려하게 피어있고, 나무가 우겨져 따가운 햇빛을 가려주고 있었다. 은은히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더워진 몸을 시냇가에 담그자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아무리 들이켜도 질리지 않는 꽃과 나무의 향기, 가까운 곳에서 또는 먼 곳에서 들리는 새들의 밝은 지저귐, 나무 사이로 군데군데 비치는 부드러운 햇살은 신비롭고 편안해 보였다.


시냇가 옆 언덕에는 마사지를 받는 곳이 있었다. 태국 정통복 쑤타이를 단정히 입은 여인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가 나를 보고 일어선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 곁에 눕는다. 그녀의 손길은 내 근육과 근육, 근육과 뼈사이를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내 몸의 부드러운 곳들은 단단해지고, 딱딱하게 굳어졌던 곳은 부드러워진다. 간지러우면서도 나른하다. 내가 내는 코 고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나도 모르게 잠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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